2020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국에서 날아온 두 남녀는 서로 손을 붙잡고 물었다. “너, 이거 진짜 할 거야?” “오빠도 정말 할 거지?” 비장한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은 배우 이선균과 이하늬. 두 사람은 영화감독 이원석에게 신작 ‘킬링 로맨스’ 대본을 받고 고심하던 차에 미국에서 우연히 만나 영화에 출연하기로 뜻을 모았다. “처음엔 거절하려고 감독님을 만났어요. 왜 저를 고르셨나 궁금하기도 했고요. (마음을 바꾼 이유를 묻자) 글쎄요, 그냥 운명처럼 역할을 받아들였어요.” 지난 12일 서울 소공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선균이 들려준 얘기다.
두 ‘천만 배우’가 출연을 고민한 이유는 따로 있다. 시나리오가 워낙 파격적인 데다 메가폰을 잡는 이가 이원석 감독이라서다. 데뷔작 ‘남자사용설명서’에 온갖 B급 유머를 담아낸 이 감독은 ‘킬링 로맨스’에서도 초현실적인 코미디를 선보인다. 주연배우끼리 “영화가 개봉하면 이민 가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궁지에 몰린 이를 외면치 않았던 ‘나의 아저씨’는 영화에서 ‘깡패 재벌’ 조나단으로 깜짝 변신했다. 그는 무섭다기보단 우습다. 길게 기른 꽁지머리에 콧수염을 달고 등장하더니, 그룹 H.O.T.의 히트곡 ‘행복’을 부르며 프러포즈한다.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쥔 이선균이 이렇게 망가지다니. 그는 “나와 접점이 없는 캐릭터라 연기할 때 더 자유로웠다”고 했다. “코미디 연기는 (배우가) 이완될 때 잘 나와요. 그 점에서 현장 호흡이 좋았어요. 감독님이 권위의식 없고, 다른 배우들과 관계도 편했거든요.” 이 감독은 tvN ‘나의 아저씨’ 중간광고로 나오는 이선균의 잇몸약 CF를 보고 그에게 ‘킬링 로맨스’ 대본을 줬다고 한다. 이선균은 “조나단은 과장되고 엉뚱한 캐릭터지만, 문득문득 광기를 보여주면 충분히 입체적으로 표현될 거라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촬영은 변수의 연속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 대유행 때문이었다. 당시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행돼 50인 이상이 모일 수 없는 시기였다. 대로와 해변에서 찍으려던 계획이 방역 수칙 때문에 어그러지면서 감독과 배우 모두 머리를 쥐어짰다. 조나단이 찜질방에서 승부욕을 불태우는 장면과 그가 홈쇼핑 생방송 도중 아내 여래(이하늬)와 대치하는 마지막 장면이 그렇게 탄생했다. 조나단이 입에 달고 사는 “잇츠 귯~!”도 이선균이 아이디어를 내서 쓴 대사다. 자주 가는 병원 도수 치료사의 말버릇을 가져왔다. 이런 그에게도 “삼각 수영복을 입고 ‘행복’을 부르며 프러포즈하는 장면”은 버거워 감독과 상의해 장면을 바꿨다고 한다. 이유는? “너무 더러울 것 같아서”란다.
이선균은 ‘나의 아저씨’ 속 박동훈이나 ‘기생충’의 박 사장 등 진지하고 무거운 이미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시작은 코미디였다. 그는 2001년 MBC 시트콤 ‘연인들’에서 눈치 없는 백수로 브라운관 신고식을 치렀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감독 민규동), JTBC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등이 공개됐을 땐 ‘이선균은 지질하고 억울해야 제맛’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이런 그도 “캐릭터 안에서 이렇게까지 놀아보기는 ‘킬링 로맨스’가 처음”이라고 했다. 극장가의 긴긴 보릿고개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관객들이 ‘짤’을 만드는 등 이 영화를 맛나게 갖고 놀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시트콤을 찍을 땐 현장이 주는 긴장이 엄청났어요. NG를 못 내는 게 제일 어려웠죠. 지금은 그저 제게 뭔가가 주어진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행복해요. 물론 불안함도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 제게 오는 역할이 달라지 않을까 하는…. 제게 주어진 것들을 해내며 조금씩 영역을 넓혀 가려고요. 그럴 수 있도록 믿음을 주면서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