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의사, 농부, 무당, 가드… 한 드라마에서 직업을 11개나 소화할 일이 얼마나 있을까. 흔치 않은 도전에 나섰던 배우 이제훈은 종영과 동시에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러 작품을 끝낸 듯한 기분이었단다. SBS ‘모범택시2’에서 주인공 김도기를 연기한 그는 온갖 ‘부캐’(부 캐릭터의 준말)를 소화하며 매주 색다른 캐릭터를 선보였다. 연기 외에도 편집과 음악 연출, 컴퓨터 그래픽(CG) 등 제작 분야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촬영부터 방송까지 ‘모범택시2’에 쏟은 시간은 약 7개월. 사고 없이 완주를 마치자 안도의 눈물이 절로 났다. 지난 18일 서울 역삼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제훈은 “‘모범택시’를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신나고 설레곤 한다”며 거듭 감사해했다.
‘모범택시2’는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설을 깨부쉈다. 2년 전 방영한 시즌 1은 시청률 10.7%(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해 15.3%로 마침표를 찍고, 지난 16일 막 내린 시즌 2는 12.1%로 첫 발을 떼 21%로 막을 내렸다. 5%만 나와도 성공했다는 시청률 가뭄 시대에 거둔 쾌거다. “시청률이 이렇게까지 잘 나올 줄 몰랐다”며 기뻐하던 이제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았다”며 지난날을 돌아봤다. 그는 두 시즌에 걸쳐 무지개 운수 기사 김도기로서 ‘모범택시’ 시리즈를 이끌었다.
“이전 시즌보다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목표였어요. 시즌 1는 도기의 서사에서 출발해 캐릭터를 만들었다면, 시즌 2는 시청자에게 도기를 더욱더 각인시킬 수 있도록 뾰족하게 날 세우려 했어요. 즐기자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저를 내던졌죠. 덕분에 스스로 발견하지 못했던 색다른 모습이 마구 나온 것 같아요. 시청자 반응이 좋다 보니 용기가 더 생겼어요.”
이제훈은 도기가 다양한 변장을 할 때마다 새 작품을 하는 듯했다. 농부로 위장해 사투리를 마구 쓰거나 감옥에서 미쳐가는 죄수 신세가 되고, 갓 결혼한 새신랑인 척 꾸며 잔망스럽게 애교를 부릴 때도 있었다. 머릿속에서 상상만 하던 캐릭터들을 연기하자 즐거움은 더욱 커졌다. 극 중 림여사(심소영)와 엮이는 왕따오지는 가장 정감 가는 ‘부캐’다. 그는 차기 시즌에서 왕따오지와 림여사의 재회를 상상했다면서 “창의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건 ‘모범택시’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에피소드마다 실화를 다룬 만큼 그가 느낀 무게감 역시 상당했다.
“‘모범택시’는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둔 드라마예요.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죠. 현실에선 가해자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처벌받았는지, 응어리를 해소할 만한 해결안이 나왔는지 의구심을 품는 분들이 많잖아요. 이런 생각을 드라마라는 판타지로 풀어낸 거죠. 이전 시즌은 사적복수를 중심으로 공권력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했지만, 이게 과연 옳은 것인지에 관한 갈등이 있었어요. 반면 시즌 2는 피해자를 보호하고 사건을 해결한다는 주제의식이 분명해요. 드라마로 사회 현상을 이야기할 수 있어 감사했어요.”
두 번째 시즌까지 연이어 성공을 거둔 만큼 차기 시즌을 바라는 목소리도 많다. ‘모범택시’ 세계관을 두고 한국판 MCU(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라는 찬사도 나왔다. 시즌 2 마지막 회에는 모범택시 1호 기사로 배우 김소연이 특별출연하며 세계관 확장을 꾀했다. 이제훈은 “영화 ‘007 시리즈’처럼 모범택시 기사도 코드명을 공유하는 여러 사람이 있겠더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외에도 그가 주목한 건 연기 외 영역이다. 실화 기반인 만큼 잘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단다. 그는 “예전엔 연기만 하면 내 몫을 다한 거라 생각했다. 이젠 촬영 전부터 촬영을 마친 이후에도 이야기 완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제훈은 tvN ‘시그널’과 영화 ‘박열’을 기점으로 크리에이티브 영역에 의견을 보태고 있다. 그는 “제작 영역을 논의하다 보면 작품에 더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다”면서 “언제든 콘텐츠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7개월 동안 ‘모범택시2’를 함께하며 문화예술산업 전반으로 발을 넓히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이 일을 평생 하고 싶어요. 저는 취미가 따로 없어요. 그저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게 낙이에요. 그래서 제가 가진 작은 꿈은 10년 안에 극장을 만드는 거예요. 좋은 영화를 보고 즐길 수 있는 곳이요. 수익을 기대하진 않아요. 소지섭 선배님이나 이정재·정우성 선배님처럼 배급과 장편 영화 연출을 다 해보고 싶어요. 당장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지난 뒤 가치 있는 작품도 만들고 싶고… 그런 작품을 온전히 즐기려면 극장이라는 환경이 꼭 필요해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배우로서 신중히 작품을 선택해 연기하겠다는 거예요. OTT 시대인 지금은 작품이 좋아야 관객이 극장을 찾을 테니까요. ‘모범택시’도 극장판 같은 특별 포맷으로 보고 싶어요. 스크린으로 무지개 운수를 만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일단은 시즌 3부터 기다려보겠습니다. 하하!”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