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아웃’. 박윤조(이연희)는 회사에서 이렇게 불린다. 그가 다니는 세용은 한국 굴지 대기업. 직업계고 출신으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윤조는 학력이나 학점 등 ‘스펙’ 없이 경력직 직원을 뽑는 세용 ‘스펙 아웃’ 전형의 첫 합격자가 됐다. 회사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팀장 지은정(김정)은 윤조가 홍보대행사 PR조아에서 보낸 시간을 “밖에서 뭘 했는지도 모르는 경력 8년”이라고 몰아붙인다. 회사는 그를 얼굴마담으로만 쓸 뿐이다. 설상가상 채용 절차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주장까지 나오며 윤조는 궁지에 몰린다.
중학생 때 대형기획사 연습생으로 발탁돼 10대 시절부터 연기만 해온 이연희는 직장인의 삶을 이해하려고 주변을 취재했다. 지난달 23일 서울 소격동 한 카페에서 이연희가 들려준 ‘레이스’ 준비 과정은 이랬다. “회사에 다니는 지인들에게 많이 물어봤어요. 1990년대생 친구들은 어떤지부터 시작해 질문을 넓혔죠. 홍보 전문가들의 일과가 궁금해서 홍보인들이 함께 쓴 책도 참고했어요.” 직장인과 배우는 다르면서도 비슷하다고 했다. “직장인은 매일 출퇴근해야 해 힘들겠더라고요. 하지만 모이면 일보단 밥 얘기를 더 많이 하는 점, 고된 하루를 보낸 뒤엔 술 한 잔으로 단합하는 점은 배우와 비슷하더라고요.”
이연희는 ‘레이스’를 “요즘 청년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느껴 출연을 결정했다. 넘치는 열정으로 일단 부딪치고 보는 윤조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고도 했다. 촬영은 이미 반년 전에 끝났지만, 이연희는 여전히 윤조와 일심동체인 듯했다. 윤조가 Z세대 직원과 언쟁을 벌인 뒤 ‘젊은 꼰대’로 불린 장면을 얘기하자 이연희는 “나도 그게 왜 ‘꼰대’인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바쁜 날 휴가를 낸 직원이) 상황 설명도 안 해주고 전화도 안 받는 게 내 세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세용 직원들이 윤조를 ‘스펙 아웃’으로만 여길 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지 않는다는 말에도 이연희는 크게 공감했다. 한때 ‘진짜 나’를 보이고 싶은 열망이 컸던 배우가 느낀 동병상련이다.
이연희는 윤조에게서 20대 시절 자신을 봤다.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조바심내는 윤조처럼, 이연희도 “연기를 잘해서 대중에게 좀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압도당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잘해야 한다,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이 압박과 부담이 돼 저를 가두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를 더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어떻게 해야 나를 내 캐릭터답게 채울지 고민하면서 연기를 즐겁게 할 방법을 찾아갔습니다.” 이연희는 노덕 감독과 웨이브 오리지널 SF 단편 드라마 ‘만신’을 그 계기로 꼽았다. “감독님과 작품 얘기를 가장 많이 나눈 작업이었다. 그때 연기하는 즐거움을 맛봤다”는 후일담이다.
“어렸을 땐 연기가 마냥 어려웠어요. 미숙하고 열정만 가득했던 시기였죠. 지금은 연기가 쉬워졌단 뜻은 아니에요. 다만 이젠 연기하는 게 즐거워요. 동료들과 더 많이 대화하며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하다 보니 정말 함께 작업하는 기분이 들어요. ‘레이스’를 통해서도 좋은 동료 배우들을 얻었습니다. 종영 회식 후 문소리 선배가 ‘고생했어’라며 안아주신 것이 큰 격려가 됐어요. 윤조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 사람일 뿐, 작품을 받친 건 함께 작업한 다른 선배 배우들이라고 생각해요.”
데뷔 초 청순한 분위기와 가녀린 외모로 ‘국민 첫사랑’으로 불렸던 이연희는 그러나 순정만화 주인공에 갇히길 거부했다. 작품 안에서 그는 엘리베이터 안내 도우미(MBC ‘미스코리아’)가 됐고, 낭만적인 프랑스에서 빡빡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여행 가이드(JTBC ‘더 패키지’)와 똑 부러져 보여도 속은 시끄러운 예비신부(카카오TV ‘결혼백서’)가 됐다. 이연희는 “국민 첫사랑 타이틀은 이미 내려놨다”고 했다. 그보다는 “내 옆의 이웃이나 친구 같은 캐릭터, 일상적 감정이 잘 표현된 작품을 더 많이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연기를 오래 해왔지만 제게 만족해본 적은 많지 않아요. 다만 내가 이 도전으로 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20대 때 쌓은 경험을 토대로, 주변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며 즐겁게 작업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