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의문의 남자가 있다. 이름도 명확히 소개하지 않은 그는 여기저기서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따라붙는 남자에게 정체를 묻자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온다. “아마도 네 인생 마지막이 될 친구?” 섬찟하게 웃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솔솔 풍긴다.
21일 개봉한 ‘귀공자’(감독 박훈정)는 의문의 세력에게 쫓기는 마르코(강태주)와 그에게 따라붙는 귀공자(김선호)의 추격기를 그린다. 영화는 귀공자가 어떤 캐릭터인지 정의한 뒤 마르코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극 초반부터 귀공자의 잔혹한 면모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귀공자는 자비 없이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방긋방긋 웃고, 다정한 말투로 한껏 여유를 부리다가도 금세 돌변한다. ‘귀공자’는 권총구를 화면 한가득 담거나 과감한 구도로 귀공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집중한다. 이후 인간 투견으로 살아가는 마르코의 고단한 삶을 비춘다.
마르코에겐 물러설 곳이 없다. 어머니 약값을 벌기 위해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코피노인 마르코에게 한국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는 애증이다. 원망하면서도 기대고 싶은 대상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코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 그를 반기는 건 정체불명의 추격자들이다. 영화는 귀공자와 마르코라는 두 갈래 길을 오가다 마르코의 한국행을 기점으로 전개 방향을 단일하게 잡아간다.
극 전반에서 박훈정 감독의 장기가 빛난다.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와 특유의 건조한 분위기를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금세 살아난다. 푸른 색감만으로도 누아르 장르를 보여주는 솜씨가 일품이다. 추격을 주제로 한 만큼 여러 추격 장면이 나온다. 맨몸 액션, 카 체이싱, 지붕 위를 오가는 긴박한 추격전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극 말미 벌어지는 롱 테이크 액션은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기대 이상인 건 김강우다. 한이사 역을 맡은 그는 위압적인 캐릭터를 실감 나게 살린다. 우아함과 과격함을 동시에 아우르는 건 물론, 장총을 활용한 액션을 막힘 없이 해낸다. 강태주의 발견은 뜻깊다. 강태주는 1980대1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강태주는 극 내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갖 곳을 구르며 몸을 사리지 않는다. 액션을 차지게 소화하면서도 마르코가 느끼는 감정을 생생히 전달한다. 귀공자를 연기한 김선호는 이미지 변신에 골몰한 흔적이 엿보인다. 착한 얼굴로 섬뜩함을 주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고아라 역시 의문점이 많은 윤주를 연기하기 위해 고민한 기색이 역력하다.
‘귀공자’에는 멋들어진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호불호 갈릴 여지가 있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평면적이어서다. 부실한 이음새나 전개 곳곳에 난 빈틈을 인지하는 순간 집중력이 흐뜨러진다. 쫓기는 대상인 마르코보다 귀공자에게 애매하게 쏠린 무게중심 역시 균형감을 해친다. 이를 희석하는 건 누아르 액션이다. ‘귀공자’는 추격 액션극이라는 본질에 충실하다. 감독 전작인 ‘신세계’의 엘리베이터 신이나 ‘마녀’의 과감한 액션을 좋아하던 관객이라면 곳곳에서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 김선호의 변신을 기다렸거나 박훈정 감독의 액션 연출을 기대했다면 볼 만한 장면이 꽤 있다. 쿠키 영상은 1개다. 상영시간 118분. 18세 이상 관람가.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