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 채로 매일 러시안 룰렛을 하는 거예요. 내가 피운 액상형 전자담배가 사실 마약일 수 있다는 거죠.”
22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2023년 대한금연학회 춘계학술대회 토론회에서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이 같이 전했다. 이 센터장은 “국내 현행법상 전자담배 안에 있는 첨가제, 첨가물 등 성분을 공개할 의무가 없고, 담배로 정의되지 않아 온라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공급자가 작정하고 몰래 마약을 넣어 판다고 해도 소비자들은 알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5일, 전자담배에 액상형 혼합 대마를 넣어 판매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당시 총 18명이 피해를 봤는데, 그 중 9명은 미성년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학생도 포함됐다.
액상형 전자담배는 유사 담배로 분류돼 담뱃갑 경고 그림과 문구 표시, 광고 제한, 전자거래 금지 등 규제를 받지 않는다. 또한 담배와 달리 니코틴 용액 용량만 표기해도 되며, 이마저도 담배잎이 아닌 담배의 줄기나 뿌리로 만든 용액이면 성분을 표시하지 않아도 된다. 일반 담배와 궐련형 전자담배는 국내 담배사업법과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라 담배갑에 니코틴과 타르, 벤젠, 비소, 니켈, 카드뮴, 나프틸아민, 비닐 클로라이드 등 8종을 표시해야 한다.
액상형 전자담배는 판매 사이트에서 성인인증만 하면 온라인으로 쉽게 유통이 가능하다. 그만큼 청소년들의 접근 가능성도 높다. 질병관리청이 실시한 ‘2022년 학생 건강검사 및 청소년건강행태조사’ 결과, 청소년 흡연율은 일반담배 기준 남학생이 6.2%, 여학생이 2.7%로 1년 전(남 6.0%·여 2.9%)과 유사한 수준이었지만, 액상형 전자담배는 남학생이 3.7%에서 4.5%로, 여학생은 1.9%에서 2.2%로 올랐다.
이 센터장은 “액상형 전자담배는 몇년 째 제대로 된 규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너무 쉽게 청소년들이 제품을 구할 수 있다”며 “대치동 마약 음료 사건과 같이 액상형 전자담배도 청소년에게 마약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음을 국민께 알리고 적극 홍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담배 관리 관련 법안 ‘법사위 문턱’… 국민 동참 필요성 제기
현재 제21대 국회엔 담배 성분 공개 관련 법안 6건이 발의돼 있다. 그 중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 소관의 ‘담배의 유해성 관리법 제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 기획재정부 소관의 ‘담배사업법 개정안’은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에 올라온 상태다.
정부는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담배에서 발생하는 유해성분 종류와 양을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아직 본회의에 오른 적은 없다. 기재부와 복지부 가운데 누가 담배 성분을 관리할지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담배 회사의 반발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법사위 문턱에 놓인 보건 당국의 법안도 추진 위기에 놓여 있다. 기재부가 제정법이 아닌 담배사업법 개정으로 입법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장을 밝히면서 국회에서도 보건 당국의 법안 계류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법사위가 입장을 바꾸면서 법안 심사 결론이 곧 날 것으로 예측된다. 이 센터장은 “학술대회 시작 전날 법제사법위원회가 갑자기 담배유해성분공개법안을 재심사하겠다고 결정하면서 이른 시일 내 결과가 판가름 날 것 같다”며 “통과되든 통과되지 못하든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서라도 담배 정의 개선, 성분 공개 같은 규제 강화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 날 토론회에 참여한 정부 관계자도 이에 공감하며, 법적 테두리 마련을 위해 국민의 참여도도 높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정연희 복지부 건강증진과 과장은 “해외에서는 이미 법적으로 담배의 모든 성분을 공개하도록 의무화 돼 있다. 한국은 유독 담배 유해성에 대해 둔감한 편”이라며 “담배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얼마나 나쁜 지 적극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성분 하나하나가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면 국민의 생각도 달라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국민이 담배의 위해성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금연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이 담배 성분에 대한 궁금증과 경각심을 갖도록 인식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며 “보건 당국도 담배에 대한 규제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