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시엔 호르닉(Sien Hoornik)을 모델로 축 처진 가슴과 탄력 없는 근육과 불룩한 배를 가진 비탄에 빠진 누드를 통해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보여준다.
그녀는 아무런 보호막도 없이 바닥에 앉아 생의 고단함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인간에게 닥친 처절한 운명 앞에 주저앉아 좌절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리얼하게 보여준다.
1881년 1월, 반 고흐는 친지인 헤이그 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Anton Mauv)와 구필 화랑 지점장의 도움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었다.
이때 알프레드 상시에(Alfred Sensier)가 쓴 밀레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무명화가이지만 고단한 삶의 슬픔을 그리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안톤 모베에게 목탄과 파스텔화 그리고 수채화 그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 시절에 1882년 29살의 반 고흐는 5살난 딸을 데리고 임신한 채 버려진 30살의 매춘부 시엔을 술집에서 만난다. 얼굴엔 천연두 자국이 가득한 그녀는 알코올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그리려면 그것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해 매춘부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헤이그에서 지내며 짧은 시간이지만 행복했다.
시엔은 60여 점의 수채화와 드로잉의 모델이 되었다. 시엔의 아기가 태어나자 “아기가 잠든 요람 옆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여자 옆에서, 남자의 마음은 깊고 강렬한 감정으로 가득 찬다”라고 테오에게 말했다. 반 고흐에게 ‘여자는 종교와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엔으로부터 임질이 옮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금씩 회복되던 가족과의 관계에 다시 금이 갔다. 그림을 가르쳐 주던 안톤 모베와도 시엔 때문에 절교하게 되었다. 고흐는 네 살 아래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는데, 동생도 등을 돌릴까 두려웠지만 다행히 그는 형을 계속 도왔다.
“나는 이 못생기고 시들어 버린 여인만큼 소중한 조력자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네. 누가 뭐라하건 그녀는 나에게 아름다운 여인이네.”
네덜란드 시절 만났던 귀족 출신의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에게 쓴 편지에서 고흐는 시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단 한번도 선함을 본적이 없는 그녀가 어떻게 선량해질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
결국 주변의 반대로 시엔 가족을 버린 반 고흐는 무척 고통스러웠다. 시엔은 1904년 스헬더강에 투신하여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인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1881년 1월, 얼마 전 남편을 잃은 7살 연상의 이종사촌 코넬리아 키 보스스트릭커(Corneliia Vos-Stricker, 케이)와 아들 얀이 네덜란드 누에넨의 목사관을 방문한다. 어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반 고흐는 언제나 여인의 사랑에 목말라 했으며, 특히 연상의 여인들에게 사랑에 빠지곤했다.
반 고흐는 직업뿐만 아니라 사랑도 실패의 아이콘이었다. 이전에 1873년 6월, 구필 화랑 때문에 체류하던 런던 하숙집에서 그 집 딸인 유제니 로이어(Eugenie Loyer)에게 구혼했다. 이미 전 하숙생과 비밀 약혼을 한 유제니는 거절하였고, 반 고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반 고흐는 누에넨에서 만난 케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이란 두 사람 영혼의 파장이 일치하는 순간 타오른다. 일방적인 반 고흐의 저돌적인 행동에 놀란 케이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갔다. 케이를 찾아간 반 고흐는 촛불에 손가락을 넣고 만나게 해줄 때까지 손가락을 꺼내지 않아 이모부 댁 가족들을 놀라게 할 만큼 충동적이고 스토커처럼 집요했다. 반 고흐에겐 균형감각이 부족했다.
1884년 고향인 네덜란드 누에넨에서 어머니가 다리를 다쳐 간호하던 반 고흐는 이웃집에 사는 9살 연상의 마르호트 베게만(Margot Begemann)이 반 고흐를 좋아해 결혼을 추진한다. 그녀는 반 고흐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할 만큼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여인이었지만 그를 사랑했다.
반 고호는 죽으며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들은 모두 테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데 동의했다. 화가가 되기로 한 뒤 테오가 형을 부양해왔기 때문이다.
1891년 1월, 그가 죽고 6개월 뒤 테오도 서른 넷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테오는 1889년 결혼해 아주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이후 그의 아내와 함께 고흐의 컬렉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을 상속받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 봉게르(Jonhanna van Gogh-Bonger)는 형제 사이에 오간 편지를 읽고 나서 “앞으로 내가 할 일은 테오가 남긴 아들 빈센트 빌럼을 잘 키우는 것과 천재인 시숙 빈센트 반 고흐를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라 스스로 다짐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일했고 또한 영어 교사였기에 그런 다짐을 실천할 수 있었다. 테오는 형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 주었다. 그녀는 남편과의 사별 후 반 고흐의 작품과 편지를 가지고 파리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그후 수많은 반 고흐의 작품을 유지하면서도 몇 작품은 판매하여 명성은 올리되 작품의 가치는 떨어뜨리지 않도록 관리를 잘했다. 반 고흐에게 사랑하는 여인을 가질 복은 없었지만, 제수 복은 있었던 모양이다.
요한나는 1901년 화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코헨 호스할크와 재혼을 했다. 그는 대여, 판매 또는 전시회에 내보낼 작품을 분류하는 등 요한나를 도와주었다. 그녀의 그런 노력 덕분에 1905년 드디어 암스테르담 시립 박물관에서 첫 번째 반 고흐 전시회가 열렸고, 반 고호의 가치를 세상이 알아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요한나는 다시 미망인이 되었다. 그녀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묘지에 있던 테오의 유해를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 있는 형의 무덤 옆으로 이장을 했다. 요한나는 참으로 현명한 여인이었다.
두 형제의 무덤에 우거진 담쟁이는 생전에 고호가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 가세 박사의 아들이 심었다. 그리고 같은 해, 요한나는 1914년 프랑스어로 오간 형제 간의 편지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하여 출간했다. 이후 뉴욕으로 이주해 편지를 영어로 번역하다 사망했다. 반 고흐와 테오가 나눈 668통의 편지는 모두 반 고흐 미술관에 있다.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와 왜 그런 구도를 잡았는지 그리고 색은 왜 그렇게 칠했는지 등 자세하고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은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서간 문학으로도 가치가 있다.
가정의 행복과 사랑을 갈망하던 한 남자였지만,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고독한 화가였다.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반 고호의 일생은 너무나도 애처롭고 아쉬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에게는 든든한 동생 테오와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 제수 요한나가 있었기에 오늘날 위대한 예술가의 혼으로 부활하여 전 인류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