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으로 비행기가 돌진했다. 세계무역센터를 겨냥한 폭발 공격이었다. 미국은 하늘길을 닫았다. 갈 곳 잃은 비행기 38대는 캐나다 작은 도시에 불시착했다. 1만여 주민이 사는 갠더였다. 하루아침에 이방인 7000명을 맞은 갠더는 분주했다. 버스 회사는 파업을 멈추고 손님들을 실어 날랐다. 마트에선 뭐든 공짜였다. 겁에 질린 사람들도 갠더 시민들이 내준 온기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컴프롬어웨이’ 어땠어?
친절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뮤지컬 ‘컴프롬어웨이’는 그렇다고 말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개막한 이 작품은 9·11 테러 직후 닷새간 갠더에서 벌어진 실화를 다룬다. 갠더는 흡사 동화 같다. 주민 모두 활기차고 따뜻하다. 그들은 선의로 불청객을 돌본다. 그중엔 성 소수자가 있다. 유대인이 있다. 심지어 동물들도 있다. 갠더는 이들을 차별 없이 품는다. 커밍아웃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유대인을 위한 특별식을 만든다. 동물마저 뒷전이 아니다. 매일 밥을 주고 출산까지 돕는다. 불청객엔 또한 무슬림도 있다. 테러를 저지른 이들 역시 무장한 무슬림이었다. 두려움은 배척을 부른다. 승객들 사이에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고성이 나온다. 갠더는 조용히 이들을 품는다. 위축된 무슬림을 인적 드문 도서관으로 데려가 보호한다.
뉴욕에서 벌어진 테러는 갠더에 머물던 이들에게 저마다 다른 흔적을 남긴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는다. 누군가는 매일 차별을 마주한다. 트라우마를 앓는 이도 있다. 모든 상처가 씻은 듯이 치유되진 않는다. 다만 이들에겐 내 것이 아닌 상처를 함께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컴프롬어웨이’는 혐오로 분열된 사회에 포용과 연대의 힘을 역설한다. 백화점이 무너진 자리에 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고, 참사 희생자에게 ‘누칼협’(누가 칼들고 협박함)을 묻는 한국에선 이 작품이 다른 의미로도 각별하다. 우리가 잃은 것을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 보여줘서다. 애도는 내 것이 아닌 상처를 함께 기억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제대로 기억하려면 우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애도하고 있는가. 떠들썩한 음악 속에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무거운 질문이 고개를 든다.
주목! 이 배우
갠더 마을 주민들은 극 중 노래 가사처럼 “인정사정없이 착한 사람들”이다. 한 치 망설임 없이 가진 것을 내어준다. 자칫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들이 땅에 발을 붙인 인물로 보인 데는 배우들 몫이 크다. 뷸라를 연기한 배우 정영주는 이 점에서 특히 빛난다. 배우가 뿜어내는 다정하고 강인한 기운이 캐릭터의 선의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뷸라는 캐나다 재향 군인회 갠더 지부 회장으로 비행기 탑승객 한나와 남다른 교감을 한다. 아들이 소방관이라는 공통점 덕분이다. 둘의 이야기는 관객들의 ‘눈물 버튼’이다. ‘컴프롬어웨이’에선 배우 12명이 100여개의 배역을 나눠 맡는다. 정영주 역시 뷸라와 비행기 탑승객 들로리스를 동시에 연기한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