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은 한국 걸그룹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일 열린 제15회 멜론뮤직어워드 시상식에서는 ‘톱 10’ 가운데 절반을 걸그룹이 차지한 가운데 뉴진스가 올해의 아티스트와 베스트송 등 5관왕을 휩쓸었다. 아이브가 앨범상을 거머쥐었고 뮤직비디오상은 스테이씨에 돌아갔다.
팝의 종주국이자 스파이스걸스(1990년대 최고 팝스타)의 나라 영국에서는 트와이스, 에스파, ITZY(있지), (여자)아이들이 지난 9월 잇따라 콘서트를 열었다. 그에 앞서 블랙핑크는 7월 ‘브리티시 하이드파크 서머타임 페스티벌’에 한국 가수 최초로 헤드라이너(간판 출연자)로 나섰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은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한국 걸그룹들의 활동상과 인기 배경을 집중 조명했다. 기사 제목은 ‘K팝 걸그룹이 영국을 정복한다’였다.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도 뉴진스, 르세라핌, 피프티피프티, 블랙핑크 등 한국 걸그룹의 활약이 돋보였다. 일본의 연말 가요대상 시상식에도 뉴진스, 트와이스, 르세라핌 등이 대거 초대받아 수상을 노리고 있다.
지난 9월 3일부터 11월 12일까지 서울 대학로에서는 한국의 걸그룹 초창기 역사를 시대별로 극화한 뮤지컬 ‘시스터즈’가 선보여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는 한국 최초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즈와 해외 진출 1호 김시스터즈가 등장한다. 두 그룹에 공통된 인물이 하나 있다.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이다.
이난영은 저고리시스터즈의 리더였을 뿐 아니라 딸들을 김시스터즈로 키워낸 제작자였다. 올해는 그의 데뷔 90주년이자 김시스터즈 데뷔 70주년이어서 한국 걸그룹에는 여러모로 뜻깊은 해로 기억될 만하다.
본명이 이옥례(호적명 이옥순)인 이난영은 1916년 목포 유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에 재능을 보여 유랑극단 막간(幕間) 가수로 활동하다가 OK레코드 이철 사장 눈에 띄어 1933년 9월 ‘향수’로 데뷔했다.
‘불사조’와 ‘봄맞이’까지 연속 안타를 친 뒤 1935년 9월 불멸의 히트곡 ‘목포의 눈물’을 취입했다. OK레코드와 조선일보가 주최한 향토 노래 공모에서 1등으로 뽑힌 문일석의 가사에 ‘타향살이’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 음반은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3만 장이나 팔려나갔고 이난영은 중국과 일본으로도 순회공연을 다녔다.
1936년에는 음악 천재로 꼽히던 김해송(본명 김송규)과 결혼했다. 일본 유학파 출신인 그는 ‘오빠는 풍각쟁이’ 등 만요(漫謠·요즘 말로 코믹송) 작곡가이자 기타 연주자로 조선악극단과 KPK악단을 이끌었다.
김해송은 가수이던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 이난영은 1942년 오빠가 작곡한 ‘목포는 항구다’를 불러 ‘목포의 눈물’과 1937년 ‘해조곡’에 이은 목포 노래 3부작을 완성했다.
이난영은 1939년 장세정·박향림·이화자 등과 함께 한국 걸그룹의 효시인 저고리시스터즈를 결성했다. 4~8명으로 활동했는데, 이난영과 장세정을 제외하고는 고정 멤버가 아니라 그때그때 바뀌었다. 그룹명처럼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음반은 남아 있지 않다.
1950년 6·25가 터져 남편은 납북되고 방 13칸짜리 서울 필동의 저택은 불에 타버렸다. 졸지에 홀로 7남매를 거느린 가장이 된 이난영은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살 남짓한 영자·숙자·애자 세 자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1953년 주한미군 클럽 무대에 올렸다.
팝송 가사의 뜻도 모른 채 무작정 외워 불렀으나 미군들은 앙증맞은 소녀들의 노래와 율동에 흠뻑 빠졌다. 그해 수도극장(훗날 스카라극장으로 개명)에서 공연도 펼쳤다. 이때부터 키가 큰 맏언니 영자 대신 이봉룡의 딸 민자가 합류했다.
김시스터즈의 명성은 해외에까지 전해졌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아시안쇼를 기획하던 톰 볼은 새로운 흥행거리를 물색하려고 일본을 찾았다가 소문을 듣고 한국으로 건너와 계약을 체결했다.
딸 둘과 조카가 한국을 떠나던 날 이난영은 신신당부했다. “성공할 때까지 한국에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다른 가수들과 차별화해야 하니 악기를 배워라. 당분간 남자들은 사귀지 말아라.”
1959년 1월 9일, 김시스터즈가 라스베이거스 선더버드호텔의 쇼프로그램 '차이나 돌 레뷔'(China Doll Revue)에 등장했다. 앳된 얼굴과 가녀린 몸매답지 않게 폭발적인 가창력, 파워 넘치는 춤, 신들린 듯한 연주 솜씨를 선보여 관객을 매료시켰다. 원조 한류 가수이자 K팝 스타 1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다른 호텔에서도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김시스터즈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한국에서 온 김시스터즈입니다”라고 소개한 뒤 꼭 '아리랑'을 불러 코리아와 한국 문화를 알리려고 힘썼다.
노래할 때마다 악기를 바꿔가며 연주한 것도 주목을 끌었다. 색소폰(숙자), 베이스(애자), 드럼(민자)을 중심으로 가야금, 장구, 기타, 트럼펫, 바이올린, 아이리시백파이프 등 20여 가지 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라스베이거스의 샛별’에서 이른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한 계기는 CBS TV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등 당대 톱스타들이 등장했던 인기 최고의 버라이어티쇼였다.
김시스터즈는 데뷔 첫해 9월부터 22번이나 출연했다. 이듬해 리메이크곡 ‘찰리 브라운’ 등 12곡을 수록한 첫 음반을 내놓았다. 대부분 노래를 영어로 취입했지만 ‘아리랑’과 이난영의 ‘봄맞이’만은 한국어로 불렀다.
시사잡지 '라이프'는 1960년 2월호에 김시스터즈를 특집 화보로 소개했다. 폭발적인 반응을 발판 삼아 무대를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 등으로 넓히고 해외로도 발을 뻗었다.
1966년 유명 사회자 밥 호프와 함께 베트남에서 참전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펼쳤다. 같은 해 이탈리아·영국·프랑스·스페인·독일 등 유럽 순회공연에 나섰다. 몬테카를로에서는 그레이스 모나코 왕비를 위해 특별공연을 열었다.
김시스터즈는 미국 진출 10년 만에 18인조의 개인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카리브해 푸에르토리코에 호텔 나이트클럽을 열 정도로 돈을 벌었다. 스타더스트호텔 전속 시절 주급이 1만5000달러에 달해 라스베이거스 고액 납세자 4위에 랭크된 적도 있었다.
1970년 5월 서울 시민회관에서 나흘간 무대를 꾸몄다. 조국을 떠난 지 12년 만이었다. 1973년 사촌인 민자가 탈퇴한 뒤 첫 멤버였던 영자가 1975년 합류해 1983년까지 활동했다. 이들의 남동생인 영일·상호·태성도 김브라더스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김시스터즈와 하와이에서 합동 공연을 펼쳤다.
이난영은 1962년 미국을 방문해 김시스터즈와 함께 TV쇼에 출연하는가 하면 하와이에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기도 했다. 이듬해 귀국해 외롭게 지내다가 1965년 4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1968년부터 이난영을 추모하는 난영가요제가 목포에서 열리고 있고, 1969년 10월 유달산 중턱에 전국 최초로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졌다. 2017년 1월에는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이 개봉됐다. 2020년 6월에는 목포에 ‘이난영&김시스터즈 전시관’이 들어섰다.
K팝이 인기를 끌고 한국 걸그룹이 주목받을수록 이난영과 김시스터즈가 소환된다. 최근 들어 TV 프로그램 등에서도 이들을 자주 거명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이 K팝의 창세기를 모른다. 이난영을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로만 기억하면 곤란하다. 가수 출신 연예 제작자인 이수만(SM엔터테인먼트), 양현석(YG), 박진영(JYP)보다 40년 이상 시대를 앞서간 대중문화계의 선각자로 대접해야 마땅하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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