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굽은 노인이 모자 달린 망토로 얼굴을 가리자 객석 곳곳에서 망원경이 솟아났다.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망원경을 움킨 손끝에서 느껴졌다. 잠시 후. 괴팍했던 노인이 망토를 벗자 잘생긴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은 피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관객 함성이 공연장 천장을 뚫을 기세로 솟구쳤다. 서울 잠실동 샤롯데시어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드라큘라’는 10년째 뜨거웠다.
그중에서도 ‘샤큘’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샤큘’은 김준수가 가수로 활동할 때 쓰는 예명 시아(XIA)와 배역 이름 드라큘라를 붙여 줄인 애칭이다. 그의 공연은 ‘회전문 관객’이 많다. 관객들이 망원경을 드는 타이밍이나 방향만 봐도 김준수가 어디서 등장하는지 미리 알 수 있을 정도다. 지난 14일 공연장에 가보니 일본인과 중국인 등 외국인 관객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2003년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해 한류를 이끈 김준수의 저력이 돋보였다. 티켓박스엔 ‘매진’이라고 적힌 안내문이 내걸렸다. 3차 예매분까지 김준수 공연은 모두 매진이라고 한다. 유료관객점유율은 97%(전관 제외)다.
‘드라큘라’는 흡혈귀 드라큘라 백작의 순애보를 조명한다. 드라큘라는 결혼 직후 아내를 잃었다. 신을 저주하며 인간을 향해 복수심을 키웠다. 그 세월이 장장 400년이다. 영생을 꿈꾸던 드라큘라는 미나를 만나며 달라진다. 이런 그를 반 헬싱 교수가 쫓는다. 원작 소설을 쓴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는 공포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나약함을 충돌시켰다. 뮤지컬은 드라큘라의 로맨스에 주목한다. 촉망받던 청년이 흡혈귀가 돼 자신을 파멸하는 과정을 보여줘 관객 눈물샘을 자극한다. 작품은 초연 때부터 지난 시즌까지 한국에서만 40만 관객을 불러 모았다.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 쓴 음악은 배우들 가창력을 시험하는 듯하다. 인물의 감정이 격정으로 치달을 때마다 절규 같은 고음을 소환한다. 드라큘라의 과거가 드러나는 노래 ‘그녀’(She)는 김준수의 아이디어로 달라졌다. 원래는 드라큘라의 400년 인생사를 장황한 대사로 설명했는데, 김준수가 제안해 대사를 노랫말로 축약했다. 쇳소리가 특징인 그의 목소리는 판타지를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드라큘라 말고도 죽음 그 자체(‘엘리자벳’)나 베일에 싸인 천재(‘데스노트’)를 연기할 때 유독 반응이 좋았다. ‘드라큘라’에선 배우 신성록과 전동석이 김준수와 같은 역을 소화한다. 미나는 배우 임혜영·정선아·아이비가 나눠 맡았고, 반 헬싱 교수는 손준호와 박은석이 번갈아 연기한다.
대극장 뮤지컬을 자주 보지 않은 관객이라면 ‘드라큘라’ 무대 규모에 놀랄 것이다. 4중 턴테이블이 수시로 돌아가며 관객을 대저택과 기차역, 공동묘지 등으로 데려간다. 드라큘라의 은신처인 관(棺)은 마치 마술 같다. 혼자서 눕고 선다. 드라큘라는 관 안에 든 채 공중에 매달리고, 관객들 눈을 속여 관 안과 밖을 오가기도 한다. 제아무리 ‘드라큘라’를 많이 본 관객도 이 비밀스러운 움직임까지 밝혀내긴 어려우리라. 공연은 내년 3월3일까지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