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LA(로스앤젤레스)에 왔을 때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 63센트였다. 그걸 메꾸려 은행에 가 ‘1달러를 저금하겠다’고 하니 은행원이 정말이냐고 되물어봤다. 그땐 그 무엇에도 확신이 없었다. 제가 이런 것을 들 줄은 전혀 몰랐다.”
그가 말한 ‘이런 것’은 드라마계 아카데미로 불리는 미국 에미상 트로피였다. ‘마통’을 들고 할리우드에 입성해 인생 역전극을 쓴 주인공은 이성진 감독. 2008년 미국 시트콤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의 각본을 쓰며 방송작가로 데뷔한 그는 직접 집필·연출·제작한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로 에미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골든글로브 3관왕, 크리틱스초이스 4관왕에 이은 승전보다.
이 감독은 15일(현지시간) 미국 LA 피곡 극장에서 열린 제75회 프라임타임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부문 감독상과 작가상을 수상했다. ‘성난 사람들’은 작품상을 받았고, 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스티븐 연과 앨리웡도 각각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캐스팅상 등을 포함하면 이 작품으로만 총 8개 부문에서 상을 가져갔다.
‘성난 사람들’은 수리공으로 일하며 힘들게 먹고사는 대니(스티븐 연)와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늘 위태로운 에이미(앨리 웡)의 복수전을 따라간다. 작품은 대니가 한인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 등 이민자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리면서도, 현대인 누구나 겪을 법한 자기 파괴적인 충동을 펼쳐내 보편성을 얻었다. 분노 사회를 파고든 드라마는 “‘오징어 게임’ 이후 최고의 TV 쇼”(영국 GQ), “내면의 깊은 슬픔에 맞서는 냉소적인 사람들에 대한 어둡고 실존적인 스릴러”(영국 가디언)란 호평을 받았다. 넷플릭스 시청 순위 톱10에도 5주 연속 들었다.
이 감독은 자신이 당한 난폭운전을 토대로 ‘성난 사람들’을 썼다. 지난해 8월 한국을 찾은 그는 “상대를 이해하지 않고 분노만 표출하면 얼마나 위험한 상황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주인공 대니에겐 이 감독이 경험한 이민자의 삶이 녹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떠난 이 감독은 한때 ‘소니’(Sonny)로 불렸다. ‘성진’을 제대로 발음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 내린 고육지책이었다. 이 감독이 한국이름을 다시 쓴 건 2019년 애니메이션 ‘투카 앤 버티’를 내놓으면서부터다. 같은 해 영화 ‘기생충’을 들고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등 국제무대를 밟은 봉준호 감독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성난 사람들’ 엔딩크레딧에도 ‘성준 리’나 ‘소니 리’ 등 미국식 표기 대신 ‘이성준’이란 이름이 뜬다.
사회초년생 시절 미국 NBC 방송사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생계를 꾸리던 이 감독은 이제 마블과도 일한다. 내년 7월 개봉 예정인 영화 ‘썬더볼트’ 각본을 그가 쓴다. 영화엔 칸 영화제에서 신인상 격인 트로페 쇼파르를 수상한 배우 플로렌스 퓨 등이 출연한다. 이 감독은 내한 당시 “할리우드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어떻게 하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글을 쓸까 고민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다양성이 중요해졌다. (할리우드가) 한국인의 집단적 경험 자체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