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을 몰고 고려를 습격한 수만 명의 거란군. 곳곳에서 들리는 비명과 신음, 창이 살을 뚫는 소리. 죽음이 두려워 달아나는 고려군 무리를 노병이 역행한다. “고려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고려는 승리할 것이다….” 이 작은 읊조림으로 수세를 완전히 뒤집은 이는 고려 상원수 강감찬(최수종). 고려시대 세 차례에 걸친 여요(고려-거란)전쟁을 다룬 KBS2 ‘고려 거란 전쟁’은 얼핏 강감찬이란 영웅을 통해 승리의 역사를 되짚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전쟁을 통해 반전을 말하고 싶었다”
“차라리 죽여주십시오.” 고려 장수 양규(지승현)가 고작 2000여명의 군사로 거란의 40만 대군을 물리친 흥화진 전투 직후, 승리의 함성을 기대한 시청자에게 드라마는 뜻밖의 장면을 보여준다. 전투에서 입은 부상이 괴로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병사의 호소가 그중 하나다. 가족이 포로로 끌려가 화살받이로 죽은 백성들 입에선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KBS 대하사극으로는 역대 가장 많은 제작비(270억원)을 들여 실감 나는 전투 장면을 만든 ‘고려 거란 전쟁’은, 그러나 전쟁을 볼거리로만 쓰지 않는다. 승리로 끝난 전쟁마저도 폐허를 남긴다는 점에 주목하며 평화를 역설한다. “전쟁엔 승자와 패자가 없고 오직 피해자만 있음을 드라마에 투영”해 “반전을 이야기하는 것”(김한솔 감독). 시청률 10%를 돌파하며 승승장구 중인 ‘고려 거란 전쟁’의 미덕이다.
드라마 제목에 귀주대첩이나 강감찬 등 특정 사건 혹은 인물을 내세우지 않은 것도 전쟁을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전쟁이 벌어진 이유와 전쟁을 둘러싼 각기 다른 입장을 짚으며 전쟁의 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쟁을 막기 위한 강감찬과 현종(김동준)의 전략과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양규의 비책도 꼼꼼하게 다룬다. 전우성 감독과 함께 ‘고려 거란 전쟁’을 공동 연출한 김한솔 감독은 쿠키뉴스에 “실제 역사를 보면 현종과 강감찬은 귀주대첩으로 거란을 대파하고도 더는 확전하지 않고 평화를 선언한다”며 “우리 선조들이 몸소 보여주신 평화의 메시지를 현대사회 세계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철부지 된 현종? ‘여론 반전’ 가능할까
‘고려 거란 전쟁’은 현대인의 시선으로 재조명한 전쟁 역사이자 현종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현종은 삶이 드라마틱했다. 유년 시절 억지로 승려가 돼 절에서 지내다가 강조 정변으로 왕위에 올라 귀주대첩 등 전쟁을 치러냈다. 작품은 그간 강감찬의 조력을 받아 군주로 성장하는 현종의 모습을 보여줘 대체로 호평받았다. 다만 지난 14일 방송에선 여론이 돌아섰다. 지방개혁 정책을 두고 강감찬과 대립하던 현종이 분노에 차 말을 타다 낙마하는 장면이 결정적이었다. 드라마 토대가 된 소설 ‘고려 거란 전쟁’을 쓴 길승수 작가마저 “한국 역사상 가장 명군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쓴소리를 했다. 제작진은 19화(20일 방송)부터 현종의 성장이 이뤄질 거라고 예고했다. 전 감독은 드라마 홍보사를 통해 “몽진에서 고려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치고 돌아온 현종이 어떻게 전란의 상처를 딛고 고려를 하나로 모아가는지, 또 전쟁을 이끄는 군주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