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리그’로 불리던 제약 산업에 새로운 인수합병(M&A) 바람이 불고 있다. 제약 산업과는 거리가 먼 타 분야를 이끄는 대기업들이 제약사를 품기 시작한 것이다. 업계에선 산업을 키울 기회라는 시각과 제약사 간 개발력 편차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엇갈린다.
23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태양광·신에너지 전문 기업 OCI 홀딩스는 지난 12일 한미약품그룹의 지주회사인 한미사이언스와 그룹 간 통합을 위한 합의 계약을 체결했다. 지난 15일에는 제과회사 오리온이 제3자 배정 유상증자와 구주매각을 통해 항체약물결합체(ADC) 전문기업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의 최대주주가 됐다.
OCI그룹과 오리온은 제약 산업에 발을 들이며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마련하고자 한다. 신약 개발에 성공한다면 수조원에 달하는 매출을 끌어들일 수 있다. 한미약품과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의 경우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비만·ADC 치료제 분야 개발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기업의 러브콜을 받았다.
특히 한미약품은 30개가 넘는 신약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으며 2018년부터 신약 출시를 통해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이끌어낸 만큼 개발 성과도 입증해왔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역시 ADC 관련 기술이전 실적만 5건을 달성할 정도로 높은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다.
신약 개발은 수조원의 비용이 들기 때문에 투자와 자본력이 중요하다. OCI그룹이나 오리온 같은 대기업이 막대한 자본을 갖고 신약 개발에 투자한다면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물론 제약은 정부 규제 강도가 높고 엄격한 산업인 만큼 진입이 쉽지 않다. 2002년 롯데는 아이와이피엔에프를 인수해 롯데제약을 출범했지만 의약품 규제 허들을 넘지 못해 결국 사업을 접어야 했다. CJ 역시 과거 유풍제약, 한일약품을 인수해 제약 시장에 나섰지만 매출 부진으로 매각을 선택했다.
하지만 최근 삼성바이오로직스, 롯데바이오로직스 등 성공적인 시장 진입을 알린 대기업들이 등장하면서 제약 산업을 바라보는 분위기도 달라졌다. 업계에서도 대기업의 등장이 관성적이던 기존 산업 분위기에 신선한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비슷한 경영 체계를 유지해왔던 제약사들이 긴장을 갖고 적극적인 신약 개발에 나설 것이라는 기대다.
A제약사 관계자는 “연구개발(R&D)은 자본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대기업의 투자로 자본이 확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를 통해 신약 개발을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며 “제약사들도 관성적인 경영으로는 더 이상 승부를 볼 수 없다고 느껴 새로운 먹거리 창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기업이 제약 시장에 참여하면 기관, 개인 투자자의 주목도도 높아진다. 부가적으로 자본이 흘러들어올 수 있는 구조”라며 “덩달아 정부 관심도 커져 제약 산업 육성정책 등 실질적 지원이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최근 사례가 성공적으로 정착된다면 대기업 참여는 선택이 아닌 하나의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반면 회의적인 반응도 있다. 오히려 제약사들의 개발 의지를 떨어트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B제약사의 한 임원은 “대기업의 선택을 받은 제약사는 개발 동력을 얻을 수 있겠지만 다른 업체들은 상대적으로 탄력을 갖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자본력에 따라 개발 속도가 달라지니 제약사 간 성과 편차는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분야가 다른 두 회사가 어떤 시너지를 보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인수 후 제약사가 성과를 내지 못하면 대기업은 매각해버리면 그만”이라며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 제약 산업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다각도에서 살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선혜 기자 betough@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