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는 흡사 묘지. 9개의 스크린이 면을 맞대 관 모양을 이뤘다. 관 주변에는 모자 달린 검은 망토로 얼굴을 가린 사내들이 서서 으스스한 분위기를 냈다. ‘둥-둥-탁! 둥둥둥둥-탁!’ 드럼 소리와 함께 마침내 무대 뒤편 전광판이 반으로 쪼개지자, 모두가 기다리던 일곱 청년이 고성 같은 세트에서 등장했다. 이전까진 온통 회색빛이던 공연장은 이제 발광하는 응원봉으로 형형색색 물들었다.
23일 서울 방이동 K스포돔에서 막 올린 그룹 엔하이프 콘서트는 소설 속 뱀파이어 이야기가 3D로 펼쳐진 현장이었다. Mnet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로 결성된 이들은 2020년 데뷔 때부터 뱀파이어를 음악의 주된 재료로 삼아왔다. 데뷔곡 ‘기븐-테이큰’(Given-Taken)에선 자신을 “붉은 눈”과 “하얀 송곳니”를 가진 존재로 표현했고, 사랑에 빠졌을 땐 “너 때문에 심장이 목말라”(노래 ‘피버’)라고 마음을 고백했다.
이날 공연에서도 멤버들은 뱀파이어 같았다.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를 마셔 영생을 누리듯, 엔하이픈은 관객들 에너지를 부스터 삼아 영원히 늙지 않을 듯한 뜨거움을 보여줬다. 첫 곡 ‘드렁크-데이즈드’(Drunk-Dazed) 무대부터 그랬다. 무릎 높이로 점프를 반복하느라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었는데도 지친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기세가 맹렬하긴 관객들도 마찬가지. 엔하이픈이 ‘블록버스터’(Blockbuster) ‘렛 미 인’(Let Me In) ‘스틸 몬스터’(Still Monster) 등 노래를 시작할 때마다 함성은 끝도 없이 높아졌다.
엔하이픈은 퍼포먼스를 할 때와 말할 때가 딴판이었다. 어깨에 멘 기타를 무대 뒤로 던지며 카리스마를 뿜다가도, 노래를 부르고 나선 “설렘 때문에 잠이 안 와 새벽까지 연습했다”며 팬들을 향해 윙크했다. 공연은 엔하이픈이 지난해 7월부터 8개월간 이어온 ‘페이트’(FATE) 투어를 마무리하는 자리로 마련됐다. 그래서 제목도 ‘페이트 플러스’(FATE PLUS)다. 멤버 정원은 “엔진(엔하이픈 팬덤) 여러분의 응원 덕분에 무사히 투어를 마칠 수 있었다”며 “한층 업그레이드된 콘서트를 보여드릴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맏형 중 한 명인 제이는 이날 컨디션 난조를 겪었으나 ‘팬들을 보고 싶다’며 공연을 강행했다고 한다.
세트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지는 공연이었다. 처음 관 모양으로 무대를 채웠던 스크린 9개는 공연 내내 헤쳐 모여를 반복하며 전광판 노릇을 했고, ‘어텐션 플리즈’(Attention Please)를 부를 땐 멤버들이 천장에 매달린 간이 무대에서 등장했다. 전광판엔 고성 내부 곳곳을 띄워 마치 뱀파이어의 성 안을 구경하는 듯 몰입도를 높였다. 객석엔 8200여명의 관객이 자리했다. 엔하이픈은 애초 24일과 25일 이틀간만 공연하려 했지만,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돼 이날 콘서트를 추가했다. 오는 4월과 5월엔 미국 5개 도시를 돌며 ‘페이트 플러스’ 공연을 이어간다.
소설과 영화에서 뱀파이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된 채 살았다. 엔하이픈이 표현하는 뱀파이어는 달랐다. 누구든 경계를 지우고 친구가 될 수 있음을 엔하이픈이 이날 보여줬다. “난 너에게 걸어가지/ 신세계에 닿을 때까지”(‘기븐-테이큰’)란 가사로 시작한 공연은 “떨어지지 않아 이번 세상”(‘카르마’)라는 다짐으로 막을 내렸다. 멤버들은 “엔진과 엔하이픈은 항상 운명의 선으로 연결된 존재”라며 “이 운명의 끈을 더욱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엔하이픈이 되겠다. 언제나 기꺼이 우리와 함께해 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