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해 뉴욕에서 바쁜 삶을 살아가던 나영(그레타 리)은 요즘 계속 웃음이 난다. 어린 시절 이민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사귀었던 첫사랑 해성(유태오)과 SNS를 통해 12년 만에 다시 연이 닿았다. 밤낮없이 연락을 나누던 나영은 어느 순간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해성의 존재에 생각이 깊어진다. 이곳의 인생에 충실하고 싶지만 저도 모르게 ‘두고 온 삶’으로 마음의 추가 기울어서다. 결국 일방적인 이별을 선언한 나영. 그로부터 다시 12년 후, 해성은 나영을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24년이 지나 만난 두 사람 사이엔 어떤 감정이 오갈까?
‘패스트 라이브즈’(감독 셀린 송)는 한 마디로 감독의 인연학개론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는 인연이라는 열쇳말을 두고 이야기를 곧게 뻗어나간다. 이민으로 한순간에 단절된 나영과 해성의 사이는 끊어질 듯하면서도 얇게나마 이어진다. 감독은 둘의 인연을 ‘전생’을 뜻하는 제목과 함께 확실한 시간선과 직간접적 화법으로 풀어낸다.
주인공은 나영의 삶을 한국에 두고 낯선 땅에서 노라의 인생을 산다. 그에게 과거란 전생 같다. 이름조차 희미하던 “내가 무지 좋아하던 애” 역시 흐려진 지 오래다. 그런 그를 열심히 찾는 건 남겨진 사람, 해성이다. 이들의 삶은 뉴욕과 서울의 거리만큼이나 멀고도 다르다. 가까스로 다시 연이 닿았건만, 노라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싶던 나영은 이 관계에 또 종지부를 찍는다. 엉성하게 끝난 둘 사이 관계는 12년이 지나 한 번 더 이어진다. PC 화면도 아닌 실물로 24년 만에 재회한 둘 사이 첫마디는 “와, 너다.” 기억 속 ‘너’와 만난 둘의 시간은 이틀 동안 다시금 맞물린다.
인연이란 무엇일까 거듭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감독은 단선적인 이야기에 감정선을 겹겹이 쌓아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선명히 전달한다. 대사로도 인연을 설명한다. 8000겁의 시간 흐름을 거친 운명의 교차. 나영과 해성 역시 이런 섭리에 나란히 발 딛고 섰다. 이윽고 뉴욕에서 다시 만난 이들은 둘 사이 인연의 끈을 확실히 정의한다. 모든 걸 정리하고 마침표를 찍은 나영의 눈물은 이 작품의 백미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그에게 이미 어린 시절의 나영은 없다. 떠나는 사람, 끈을 붙들려는 사람과 곁에 남는 사람. 영화 속 두 갈래 인연은 어느새 셋으로 나뉘어 저마다의 접점을 찾아간다.
데뷔작인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만듦새가 뛰어나다. 시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잘 세공된 보석처럼 유려하게 담아냈다. 이민자가 아니어도 나영이 느낀 이방인의 여러 감정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차근차근 이해의 폭을 넓힌 셀린 송 감독의 연출력 덕이다. 서울의 사실적인 모습을 담은 것 역시 이입을 돕는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선명한 지향점을 두고 착실히 나아가는 영화다. 감독의 인연론에 조금씩 스미다 보면 진한 여운과 함께 영화를 끝맺을 수 있다. 그러나 영화와의 연 역시 쉽게 끊어지진 않는다.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뒤에도 좋았던 장면을 계속 되짚게 된다. 영화는 감상에 젖지 않지만 관객으로선 감상에 오래 젖고 싶어진다. 6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등급. 상영시간 105분.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