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 조명한 찬란한 生…뮤지컬 ‘파과’ [쿡리뷰]

죽음으로 조명한 찬란한 生…뮤지컬 ‘파과’ [쿡리뷰]

기사승인 2024-03-21 17:22:21
뮤지컬 ‘파과’ 공연 장면. 조각 역의 배우 차지연(왼쪽)과 투우 역의 배우 신성록. 페이지원

잘 이은 과일만큼 생의 기운이 충만한 게 또 있을까. 짧기에 강렬한 생명의 활기, 그 찬란함을 잿빛 세계로 역설하는 뮤지컬이 나왔다. 지난 15일 개막한 ‘파과’다. 작품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다짐하던 주인공의 변화를 통해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분위기는 대체로 어둡고 때로 기괴하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알 수 없는 온기가 관객을 감싼다.

주인공 조각은 청부살인업자다. 돈 받고 사람 죽이는 일을 40년 넘게 해왔다. 연민이나 온정 같은 감정은 기를 쓰고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요즘 그는 몸도 마음도 이상하다. 동작이 굼떠지고 숨은 금세 가빠온다. 나이가 60세를 넘었으니 그야 노화의 결과라 해도, 왜 자꾸 타인의 고통에 마음이 끌리는지 알 수 없다.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와 키우더니 일면식 없는 행인을 돕느라 표적을 놓치기까지 한다.

또 다른 청부살인업자 투우는 이런 조각이 못마땅하다. 그에겐 조각을 맞닥뜨려야 할 이유가 있다. 그는 20년 전 조각의 손에 아버지를 잃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한 자신에게 조각은 “다 잊어버려”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투우는 복수하려는 게 아니다. 조각이 남기고 간 죽음은 왜 그리 달콤했는지, 자신을 매혹한 것이 죽음인지 조각인지 투우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지러이 흩어진 삶의 조각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파과’ 공연 장면. 페이지원

두 주인공이 예정된 충돌로 향하는 길은 스산하다. 색채를 뺀 무대 연출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둡고 높은 수직 벽체와 철재 계단은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준다.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큼 액션 연기가 볼거리다. 맨몸 격투와 총격, 무기를 이용한 근접전 등이 다채롭게 펼쳐져 긴장감을 죈다. 작품은 이야기를 매끄럽게 연결하기보단 강렬한 이미지를 남기는 데 더 공을 들인 듯하다. 인터파크 관람평엔 “원작을 모르면 스토리 이해에 문제가 있다”(eojin1***)는 혹평과 “세련된 미장센이 좋았다”(lans***)는 호평이 엇갈린다.

관객은 조각의 시선을 따라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소멸을 직시하고, 이를 통해 삶을 움켜쥐게 된다. 모순의 미학이 돋보인다. 구병모 작가가 2013년 출간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제목 ‘파과’는 한자에 따라 부서진 과실(破果)이나 여자 나이 16세(破瓜)를 의미한다. 작가는 뭉그러져 덩어리가 된 복숭아를 보고 소설을 구상했다고 한다. “우리 모두 깨지고 상하고 부서져 사라지는 ‘파과’(破果)임을 받아들일 때, 주어진 모든 상실도 기꺼이 살아내리라 의연하게 결심할 때 비로소 ‘파과’(破瓜)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설명이다.

조각 역의 배우 차지연은 자신이 가진 아우라로 캐릭터에 새로운 겹을 덧칠한다. 애달픔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그는 조각이 평생 억눌러온 감정의 파고로 순식간에 관객을 빠뜨린다. 그가 짓무른 복숭아에 자신의 상실을 투영하며 “아직은 남아있다/ 다가올 계절이”라고 노래할 때 객석 곳곳에선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배우 구원영이 같은 역할을 번갈아 맡고, 신성록·김재욱·노윤이 투우를 연기한다. 조각이 남몰래 열망하는 류와 강박사는 지현준·최재웅·박영수가 1인2역으로 소화한다. 어린 조각 역엔 유주혜와 이재림이 캐스팅됐다. 공연은 오는 5월26일까지 서울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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