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도시4’가 개봉하기 하루 전. 예매율은 90%를 넘기고 예비 관객만 60만명을 확보하는 기록이 쓰이고 있던 지난 2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허명행 감독은 무덤덤했다. 연출 데뷔작인 넷플릭스 ‘황야’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이다. 극장에 걸리는 첫 영화이기도 하다. “처음이라 그런지 아무것도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말을 잇던 허 감독은 “잘되고 있는 건 느껴도 민감하게 반응하진 않는다”고 했다. 스턴트 배우와 무술 감독으로 일한 만큼 매사에 초연하단다. 평소에도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무던한 성격이 엿보였다.
허 감독은 1~3편에서 액션 연출을 총괄한 ‘범죄도시’ 사단이었다. 주인공 마석도를 연기하는 마동석과는 오랜 세월 인연을 이어온 형·동생 사이다. 마동석은 늘 허 감독이 액션에만 국한하지 않고 총연출로 영역을 넓히길 바랐다고 한다. 2년 전 초봄 ‘황야’ 촬영을 막 시작했을 때 ‘범죄도시4’ 연출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새로이 시작된 연출 인생은 허 감독의 세상을 넓혔다.
허 감독이 역점을 둔 건 분위기 변주다. “무거운 누아르”를 지향해 빌런(악당)이 등장하는 부분마다 무게감을 줬다. 동료애를 살리고 싶어 형사들이 나올 때마다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을 넣었다. 장이수(박지환)를 성공한 사업가로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피터팬 콤플렉스 기질을 가진 장동철(이동휘) 역시 허 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마석도와 맞대결을 펼치는 백창기(김무열)는 특수용병이던 과거를 넣어 액션에 차별점을 뒀다. “결과적으론 응징 당해도 싸움 과정을 전편과 다르게” 하고자 한 의도다.
총연출이라는 새 직함은 허 감독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무술감독으로 참여할 땐 캐릭터가 거의 다 완성된 상태에서 액션을 연출한다면, 총감독은 캐릭터 구상 단계부터 액션을 구상한다. “작품에 더욱더 깊이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강점을 느꼈어요. 감독님과 아쉬움을 토로하며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전면에서 인물을 설정할 수 있으니까요. 덕분에 백창기 캐릭터도 외형에 평범함을 가미해 좀 더 무서운 인상을 살릴 수 있었어요. 빌런이 달라지니 마석도의 액션에도 차이가 생겼죠.”
무술감독으로 업력만 27년째. 참여한 작품만 120편을 넘긴다. 그동안 액션 외에도 영화 현장에서 차곡차곡 쌓아온 ‘짬밥’은 ‘범죄도시4’에서도 빛을 발했다. ‘황야’에 이어 ‘범죄도시4’ 촬영에 바로 돌입해도 힘든 줄 몰랐단다.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 역시 즐거웠단다. “많은 작품을 촬영했던 만큼 콘티(촬영용 연출 대본)도 머릿속에서 바로 나와요. 글만 봐도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떠오르죠. 집 많이 지어본 사람들이 집 한 채 뚝딱 짓는 것과 같아요. 제겐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어요.”
연출가로 신고식을 치렀지만 그는 제 역할을 하나로 한정 짓지 않는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생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낸다는 포부다. 이처럼 담대한 마음을 만들기까진 산고가 잇따랐다. 제작하려던 작품이 여럿 엎어진 건 기본이요, 10년가량 운영하던 제작사가 고꾸라진 적도 있었다. 뛰어난 감독들을 보며 연출가의 벽을 실감하기도 했다. 그런 허 감독을 계속 달리게 한 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한 의지다. “후배들이 꿈을 무술감독에만 한정 짓는 게 씁쓸했다”고 말을 잇던 그는 “무술감독은 50대 정도에 생명력을 다한다. 영화 작업을 오래 하고 싶다면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며 “잘 되는 사람이 생겨야 후배들에게도 꿈이 생긴다. 제작자로서 힘을 키우고 싶은 이유”라고 강조했다.
허 감독은 앞으로도 마동석과 동행을 이어간다. 현재 각본 개발 중인 ‘범죄도시’ 5~8편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허 감독은 “무술감독이든 총감독이든 상관없다. 무엇이든 나를 필요로 한다면 당연히 함께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전문가로 27년 일한” 자신감은 그의 무기다. 허 감독은 “앞으로 날 더 보여줄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려 한다”면서 “일단은 ‘범죄도시4’가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만을 바랄 뿐”이라며 씩 웃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