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쿠키뉴스가 만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원인을 밝힐 방법도, 책임을 질 이들도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급발진 피해자들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와 가능한 해결 방안을 담아봤습니다. |
“도현이가 해외여행을 갔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요.”
운전 중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차량 결함이 발생해 속수무책으로 사고가 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면 어떨까. 그저 운에 생사를 맡길 수밖에 없다면. 이상훈씨는 ‘급발진 의심 사고’로 아들이 떠났던 그날을 곱씹는다.
이씨는 지난 2022년 12월6일 오후 3시55분쯤 강원 강릉시 홍제동에서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아들 이도현 군을 떠나보냈다. 사고 이후 경찰은 해당 사건을 10개월 동안 두 번에 걸쳐 국과수에 재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12세 손자를 잃고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사 혐의로 입건된 운전자에게 이례적으로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당시 여야 국회의원들도 나서 급발진 사고 발생 시 제조사에서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조물 책임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차량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라는 가능성에 무게가 실렸다.
반면 제조사인 KG모빌리티(옛 쌍용자동차)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운전자의 페달 오조작 가능성으로 인한 사고라고 주장했다. 공정위는 산업계 파장이 우려된다며 난색을 보였다. 검찰도 운전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했다. 여야 국회의원들의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은 22대 국회의원 선거 일정과 맞물려 답보 상태를 맞았다. 21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면 자동 폐기된다.
이씨는 9년간 근무했던 KG모빌리티(옛 쌍용자동차)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상대로 급발진을 입증하기 위한 법정 공방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우리 가족들의 시간은 사고가 났던 날에 멈춰있다. 저와 가족들에겐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사고 원인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곳이 단 한 곳도 없다”며 “끝까지 가볼 생각이다. 여기서 멈출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은 억울하게 떠난 도현이가 제게 남겨준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급발진 피해자들은 스스로 피해 입증을 위해 싸우고 있다. 도현이처럼 누군가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볼 수 없다”고 호소했다. 도현이 가족들은 현재 6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목숨은 건졌으니 다 덮고 감사하게 살면 되는 건가요.”
김승찬(가명)씨는 지난 2022년 10월1일 오후 10시30분쯤 의왕시 약수터길 인근에서 딸과 아내를 잃을 뻔했다. 아내에게 선물했던 제네시스 G80의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천운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살아가는 동안 후유증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사고 이후 아내와 딸의 일상이 뒤바뀌면서 김씨의 삶도 달라졌다.
김씨는 “사고 영상을 보면 제정신으로 가속할 수 없는 도로다.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현대·기아자동차를 상대로 급발진 가능성을 제기했다. 추론이 아닌 과학적 수사를 통해 사고 원인을 밝혀달라고 요청했지만 결함이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는 사고 후유증으로 꼬리뼈 수술을 한 뒤 운영하던 가게를 닫았다. 함께 산책하던 일상을 더는 누릴 수 없다. 답답한 마음에 사고 현장에 가서 직접 운전을 수없이 해봤다”며 “딸을 태운 엄마가 맨정신으로 시속 137㎞를 내달릴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당시 사고로 후유증을 겪고 있는 김승찬 씨의 딸 김민희(가명)씨는 “사고 당시 엄마에게 뛰어내리자고 소리쳤다. 스포츠카를 타고 들을 수 없는 굉음이 들린 뒤 가속이 빠르게 붙었다”며 “브레이크를 누르던 엄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자동차 시속이 조금만 올라가도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다”고 덧붙였다.
교통사고 민간심의위원회는 김씨에게 급발진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전달했다. 다만 민간심의위원회에서는 정확한 판단이 어렵다며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제조사 측은 김씨에게 차량 결함이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김승찬 씨는 사고를 당한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을 찾을 때까지 덮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BMW라면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습니다.”
송선원씨는 지난 2023년 6월30일 오후 4시35분쯤 구매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BMW 523d 운전 중 급발진을 경험했다. 집에서 500m 떨어진 익숙한 길이었다. 사고 직후 제조사에 차량 점검을 맡겼지만, 한독모터스는 브레이크 페달 조작되지 않았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판단했다.
송씨는 “가속이 붙는 긴박한 상황에서 핸들을 양손으로 잡고 가까스로 보행자 2명을 피했다. 블랙박스 영상에 딱딱하게 굳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선명하게 녹음되어 있음에도 가속 페달을 밟았다고 결론이 나오니 너무 분하고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BMW 523d는 전방추돌방지방지 장치가 장착되어 있다. 사고 당시 전방차량추돌방지 장치(AEBS)와 급제동경보시스템(EWB)은 작동하지 않았다. 추돌 순간 에어백도 터지지 않았다. 송씨는 제조사에 명백한 차량 결함이라며 급발진을 거듭 주장하자 “소송 하시라”는 답변을 받았다.
송씨는 현재 제조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송씨는 사고 당시 브레이크를 연신 세게 누른 후유증으로 오른쪽 발 곳곳에 통증이 극심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송씨는 제조사 측이 인정할 때까지 소송을 이어갈 예정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사고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37년 운전 경력을 보유한 홍배수(가명)씨도 급발진 사고 피해자다. 홍 씨는 지난 2023년 6월18일 오전 6시쯤 수원 망포동 인근에서 출고된 지 1년도 안 된 EV6를 운전하다 급발진 의심 사고를 당했다. 당시 홍씨가 운전하던 차량이 공중에 붕 떠 내리꽂힌 사고 영상은 온라인을 통해 급속도로 퍼졌다. EV6는 시속 100km/h를 거뜬히 넘기고 아파트 화단을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홍씨는 “EV6는 생계를 위해 구입한 전기차였다. 사고로 차량은 폐차했지만, 급발진으로 입증받지 못해 매달 할부금을 납부하고 있다”며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구입한 새 차 할부금도 같이 부담하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사고 이후 장거리 운전 승객을 받기가 꺼려지는 홍씨는 수입이 절반 이상 줄었다. 그뿐만 아니라 운전 중 끼어드는 차량을 볼 때면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다.
홍씨는 “사고 당시 팔을 크게 다쳐 병원 치료를 아직도 받고 있다. 폐차 할부금, 새 차 할부금, 병원비까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사고 이후 제조사 측에서 병문안을 왔다. 유감스럽다며 쾌차를 바란다고 했다. 그 이후로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고 말했다.
쿠키뉴스가 만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증언은 힘이 없었다. 차량 결함 유무를 판단하는 국가기관, 제조사는 기계(EDR)에 기록된 정보 값이 블랙박스에 녹음된 사고 순간과 일치하지 않아도 기계의 편에 선다. 완전무결한 전자 기기는 존재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