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배우 이제훈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마음에 탈이 나서다. 그를 고민에 빠뜨린 건 MBC ‘수사반장’의 주인공 박영한. 그의 젊은 시절을 다룬 프리퀄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제훈은 원작 주인공인 선배 배우 최불암을 늘 떠올렸단다. 인간미를 가졌으면서도 단호한 그의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따라 하길 수 차례. 이내 한계에 봉착한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난 20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제훈이 들려준 이야기다.
극에서 이제훈은 거칠고 불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캐릭터를 0에서 10까지 만들어간 전작들과 달리 원작이라는 분명한 출발점이 있던 만큼 이를 의식한 결과다. 그는 단순히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청년 박영한의 혈기를 뿜어낸다. 이제훈은 최불암의 작품들뿐 아니라 KBS1 ‘한국인의 밥상’까지 챙겨보며 그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제훈은 “최불암 선생님의 모든 모습이 젊은 박영한에 투영되길 바랐다”면서 “원작에 매몰되기보다는 자유롭게 최불암 자체를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이제훈의 열정에 최불암도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대본 리딩 현장에서 만난 최불암은 그에게 가슴속 화를 느끼며 표현하라고 조언했다. 이제훈은 그 말에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단다. 시골에서 상경한 박영한 형사의 모습에 집중한 건 그래서다. 이제훈은 “‘수사반장 1958’은 최불암으로 시작해 최불암으로 끝난 작품”이라며 “영혼이 맞닿은 기분을 느꼈다”고 돌아봤다. 원작 속 박반장에 자신의 박영한이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노력한 이유다.
드라마의 기획 단계부터 함께한 이제훈은 아이디어를 내며 제작진과 함께 방향성을 잡았다. 당초 테니스보이스클럽 이야기로 마무리될 예정이던 드라마는 박영한의 성장기를 보고자 한 이제훈의 의견으로 방향성을 달리했다. 이제훈은 “좌충우돌하다 좌절하고 배움을 얻는 박영한이 동료 형사들과 한 팀을 이루며 성장하는 걸 시청자로서 보고 싶더라”면서 “원작을 본 시청자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고 했다. 그의 판단은 안방극장에도 통했다. 전작 ‘원더풀 월드’의 마지막 회(9.2%, 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보다 높은 10.1%로 시작한 ‘수사반장 1958’은 최고 시청률 10.8%, 마지막 회 10.6%로 10%대를 균일하게 유지했다.
세상을 불신하는 프로파일러(tvN ‘시그널’)부터 정의를 위해 악인을 단죄하는 다크 히어로(SBS ‘모범택시’ 시리즈)까지, 범죄 수사물과 좋은 궁합을 보이는 그에게 ‘수사반장 1958’은 새로운 선물이 됐다. “권선징악과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다루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말을 잇던 이제훈은 “이야기일지언정 그런 모습을 보고 싶어 정의구현 캐릭터에 이끌린다”고 힘줘 말했다. 이제훈은 올여름 영화 ‘탈주’(감독 이종필)를 통해 3년 만에 극장으로 돌아온다. 이번엔 10년 만기 제대를 앞둔 중사로 변신한다. 차기작으로 ‘시그널2’도 준비 중이다. 이제훈은 “감사하게도 계속 좋은 기회가 있더라”며 “가슴 뛰고 꿈꿔온 순간들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