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찾아온 고향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제 별명이 처녀뱃사공이었어요. 남한강 줄기 따라 동네 사람들을 쪽배에 태워 충주장터로 실어 날랐죠."
충주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 안정래(67) 씨는 지난 7일 40년 만에 고향을 찾아 기억을 더듬었다. 충북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는 봄이 아름다운 동네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남한강은 주민들의 젖줄이었고, 병풍처럼 둘러싼 계명산과 사우앙산은 참꽃(진달래)으로 가득했다. 안 씨 남매는 어린 시절 산을 타며 독성에 입이 얼얼해지도록 참꽃의 꿀을 따먹었다. 하지만 오빠와의 행복한 추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이던 1980년 1월 10일, 수도권의 수자원 확보를 위해 한강 본류에 국내 최대의 콘크리트 중력식댐을 착공했다. 1984년 11월 1일, 충주댐이 완공되자 본격적으로 담수가 시작되었고 마을 양쪽을 든든히 떠받치던 산세는 물을 담는 견고한 그릇이 됐다. 타고난 자연 환경이 되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그렇게 고향을 등진 안 씨는 헛헛한 마음에 고향을 찾지 않았다. 40년 세월이 흐르고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이번 성묘에 동참했다.
이날 안 씨 가족이 찾은 묘소는 어머니가 스스로 택한 묏자리다. 장남인 안수호(69) 씨는 "당시에는 산세가 험해서 몰랐는데, 물에 잠기니 명당이 됐다"며 어머니의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의 말처럼 묘소로 가는 길은 험했다. 수석이 많던 남한강 지형처럼 배가 접안한 곳에는 단단한 암반이 자리했다. 앞장선 남자 형제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네 발로 기어 올라가 작년에 묶어둔 나일론 밧줄을 찾아 내렸다. 안정래 씨는 오빠가 내려준 밧줄에 의지해 40년 만에 어머니의 묘소와 마주했다.
이런 사연을 가진 것은 안 씨 가족만이 아니다. 충주댐 건설로 7천여 가구, 4만여명의 주민이 고향을 잃었다. 그렇다고 조상을 등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몰민들은 1994년부터 사단법인 '충주호숭조회'를 설립해 1억5천만 원을 들여 첫 여객선인 운천호를 확보했다. 2009년 첫 배를 폐선하고 3년에 걸친 수자원공사의 지원으로 8억5천만 원을 들여 현재 운항 중인 30인승에 배수량 29t 규모의 영진호를 건조했다. 김영철 충주호숭조회 관리소장은 "현재 숭조회 정회원은 1천4백여명으로, 대부분 집안 장손들로 구성돼 있다"며 "고향을 잃은 수몰민 5~6백명 정도가 매년 조상을 모시기 위해 숭조회를 찾는다"고 말했다.
이날 충주에서 출발한 배는 50여분을 더 달려 충북 제천시 한수면 서창리 관봉 인근에 닿았다. 충주호숭조회는 제천시 한수면과 청풍면 일원에 위치한 묘소까지 영진호를 운항한다. 고향이 수몰되자 청주로 이주해 현재까지 살고 있는 최정훈(62) 씨는 숭조회 덕에 성묫길 부담을 덜었다. 그는 2009년까지 성묘를 위해 봉화재고개를 넘은 뒤 쪽배를 탔다. 충주에서 출발하는 것보다 시간을 절약됐지만, 1인당 1만원씩 하는 운임이 문제였다. 충주호숭조회 정회원이 되면 가구당 1년에 1만원씩만 내면 횟수 제한 없이 영진호를 타고 성묘할 수 있다. 주민들이 수몰의 아픔을 공유하며 설립한 숭조회는 30여년간 성묫길을 동행하며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최 씨는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현재 살고 있는 청주에 모셨다. 60대가 되니 체력이 달려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것도 몇 차례에 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머니는 18살에 제천 서창리로 시집 와 50대까지 세월을 보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 옆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서창리를 제2의 고향이라고 여긴 탓이다. 최 씨는 "내 욕심에 어머니를 청주로 모신 것 같아 죄스럽다"며 "자주 찾아뵙는 것만이 사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의 고민처럼 매해 충주호숭조회를 찾는 수몰민도 점차 줄고 있다. 김 관리소장은 "전체 1천4백여가구 중 5~6백가구 정도는 주소나 연락처가 바뀌어도 숭조회에 알리지 않는다"면서 "세대가 또 한 차례 바뀌고 나면 현저히 줄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매년 아버지를 따라 묘소를 찾아온 최승호(26) 씨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워낙 길이 험한 만큼 차츰 젊은 세대의 성묘도 줄어들 것 같다고 예상했다.
대부분 50~60대에 접어든 최 씨 가족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성묘를 이어갈 생각이다. 중학생 시절 고향을 떠난 최기병(54) 씨는 초등학교와 남한강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물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던 중 "지금 이 자리에 초등학교가 있었고 옆으로 남한강이 지났다"며 "명오리 쪽 산에서 양잠업(누에를 길러 생사를 추출해 비단을 만드는 산업)을 해서 뽕나무가 많았던 것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서 가장 힘들었던 것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입을 모아 '고향 사람들을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40년 전 수몰의 아픔으로 뿔뿔이 흩어진 고향이지만, 이들은 명절이란 명분으로 묘소를 찾고 오랜만에 배터에서나마 고향 사람들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