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발동에 이어 탄핵 정국까지 이어지며 원달러 환율이 치솟고 있다. 외국인 증시 이탈 가속화, 미국 관세 압박 등 다른 리스크도 산재한 상황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계속되면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터치할 수 있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원·달러 환율은 9일 서울외환거래시장에서 전거래일 오후 종가(1419.2원) 대비 17.8원 오른 1437.0원에 마감했다. 이는 지난 2022년 10월24일(종가 1439.7원)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환율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지난달 심리적 마지노선인 1400원을 돌파했고, 이제는 1500원까지 넘보는 모양새다.
외환보유액 충분하나…노무라 “원화 약세 방어에 한계”
이날 원·달러 환율 상승은 지난 주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불성립되면서 탄핵 정국 장기화 가능성이 높아진 영향을 받았다. 앞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국회에 투입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4일 야간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40원 넘게 급등, 오전 0시20분 1442원으로 순식간에 치솟기도 했다.
금융당국은 원화 가치 방어에 분주하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전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석한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를 열고 필요시 외화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 등을 통해 외화유동성을 충분히 공급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외환 유입을 촉진하기 위한 구조적 외환 수급 개선방안을 조속히 관계기관 협의를 마무리해 12월 중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당국의 적극적인 개입 의지에 외환보유액은 불안 요소로 평가된다. 환율 방어에 쓰이는 한국 외환보유액은 하락세를 거듭해 4000억달러 선에 근접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53억9000만달러로 전월 말(4156억8964만달러) 보다 약 3억 달러 줄었다. 외환보유액은 지난 2021년 10월 4692억2077만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지속해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외환당국이 환율 방어를 위해 내다 판 달러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일본 노무라증권 역시,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은의 적정 외환보유액 비율이 국제통화기금(IMF) 평균의 93% 수준에 불과해 통화 당국이 원화 약세를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한은은 해당 내용에 대해 “밝힐 입장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자본비율 점검 나선 금융권…대출 축소 우려도
금융권도 계속되는 환율 상승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환율 급등 상황이 계속되면 외화 표시 자산이나 해외 출자금 가운데 신용 위험가중자산(RWA) 등이 늘어 금융그룹 전체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하락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주요 금융지주들은 환율이 10원 높아지면 자기자본비율이 약 0.01∼0.06%포인트(p) 낮아지는 것으로 추정한다.
더 큰 문제는 대외신인도다. 한국 신용등급이 하향 변동되면 금융지주 신용등급도 동반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 신용등급 하락은 금융사의 조달금리 인상으로 연결돼 순익이 떨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환율이 올라가더라도 상승폭은 일단 제한적이라고 본다”면서 “(순익이 하락해도) 기존에 밝힌 주주환원에는 전혀 차질이 없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출 등 은행 본연의 역할이 위축될 우려도 있다. 은행들은 환율 급등으로 BIS 기준 자기자본비율과 유동성커버지리비율(LCR) 등 건전성 지표가 악화될 경우 위험자산 관리에 들어간다. 때문에 은행 입장에서 신용도가 낮은 취약계층에 대한 대출을 추가로 내주기 어려워진다.
“1500원 넘길 수도”…당국 나선다지만 효과는 미지수
앞으로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손이 커지면 외국인 투자자의 국내 증시 이탈이 더 본격화될 수 있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부진한 국내 증시로 인한 투자손실, 원화 가치 하락에 따른 환차손 확대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국내 증시 이탈이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한투자증권 리서치본부 투자전략부는 9일 보고서를 내 △탄핵 부결 △정부-여당 간 내각 구성 △여야 대치 및 국민 저항 확대시, 원·달러 환율 상단 1480원까지 갈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는 △탄핵 가결 △헌재 판결 및 조기 대선 국면 전환 시나리오에서 제시한 원달러 환율 상단 1450원보다 높다.
박형중 우리은행 연구원은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원달러 환율 상승 속도를 다소 완만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환율상승 흐름 자체를 막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연구원은 “국내 개인 및 외국인 투자자의 원화자산 회피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원달러 환율이 1500원 이상으로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고 봤다.
장기적으로 원·달러 환율이 1500원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노무라증권은 “내년 5월 말까지 원·달러 환율을 1500원 타겟으로 달러·원 롱포지션(달러 매수)을 추천한다”며 한국의 정치적 특수 상황 외에도 각종 대외 여건 악화가 원화 값을 짓누르고 있다고 분석했다. 내년 출범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대(對)중국 관세 압박이 커질 경우 위안화 가치가 하락하고 원화도 동반 약세를 보일 것이라는 얘기다.
당국의 개입이 보다 신속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IMF 외환위기 때는 환율이 1900원대까지 간 적이 있다. 지금 환율 상단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외환시장 자금 상황이 녹록치 않은 것 같다”며 “일단 이번주 토요일까지는 변동성이 해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금융당국이 신속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