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만화가 클래식이 돼서, 다시 꺼내볼 수 있는 작품이길 바라요. ‘조명가게’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 호러드라마의 기준이 됐으면 하는 야망이 있어요.”
웹툰을 그려왔고 드라마를 쓰고 있다. 한 번 주목받기도 힘든 두 분야에서 오직 ‘이야기의 힘’만으로 구독자, 시청자 모두 사로잡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장르의 기준을 재정립하려 한다. 2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조명가게’ 각본을 쓴 강풀 작가를 만났다.
‘조명가게’는 어두운 골목 끝을 밝히는 유일한 곳 ‘조명가게’에 수상한 비밀을 가진 손님들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드라마다. 불의의 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들의 면면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 호평받고 있다.
‘조명가게’에 앞서 지난해 8월 공개된 ‘무빙’은 그간 디즈니플러스의 부진이 잊힐 만큼 큰 사랑을 받았다. 여기에 ‘조명가게’까지 흥행하면서 2연타를 쳤다. 하지만 공개 전에는 호러라는 장르와 후반부로 가면서 실마리가 풀리는 전개를 고려했을 때 마냥 성공을 낙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만화처럼 홀로 하는 작업이 아니니 부담감은 더했다.
“‘무빙’은 초능력물이고 액션, 하이틴 멜로처럼 보여줄 만한 게 많잖아요. ‘조명가게’는 호러물이라서 진입장벽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각본을 쓰면서 왜 드라마가 없는지 알겠더라고요. 귀신의 정체가 밝혀지면 안 무섭잖아요. 하지만 그런 쪽으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작품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고, 그래서 짚어가는 방식을 택했어요. 드라마 산업이 위축된 요즘, 쉽지 않은 시도였어요. 만화를 그릴 때는 혼자 망하면 되니까 두려움이 없었는데, 드라마는 팀 작업이니까 ‘잘 안되면 어떡하지’ 걱정도 됐어요. 스스로 의심도 많이 했죠. 그럼에도 해보고 싶었어요.”
‘무빙’의 인기몰이에 차기작으로 ‘무빙2’가 점쳐지기도 했으나 ‘조명가게’를 선택했다. ‘무빙’의 호성적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과는 의외로 무관했다. “‘무빙’ 후반 작업 때 ‘조명가게’를 쓰기 시작했어요. ‘무빙’이 잘됐어도 ‘조명가게’를 했을 것 같아요. 만화를 그릴 때도 장르를 왔다 갔다 했어요.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게 제 보람이에요. 저도 쓰면서 재밌어야 하니까요. 깊은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놀라긴 했죠.”
작품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가장 궁금했을 현민(엄태구)의 진심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현민이 다른 인물들과 달리 지영(김설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각자의 해석에 맡기기로 했다. “기울어진 사랑일 수도 있고, 현민이가 지영이가 자신을 사랑한 만큼 지영이를 사랑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작품도 그런 지영이의 궁금증으로 끝나고요. 근데 답하기는 싫더라고요. 작품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게 아닐까 해요. 배우들도 궁금해하는데 대답 안 했어요. 모두가 틀렸다고 보긴 힘들어요.”
쿠키영상에서 공개된 김영탁의 정체, 배우 박정민도 화제였다. 김영탁은 웹툰 ‘타이밍’, ‘어게인’, ‘브릿지’에 나오는 ‘강풀 유니버스’의 핵심 캐릭터다. 강풀 작가는 박정민을 캐스팅하기 위해 3년 전부터 공들였다고 강조했다. “처음부터 박정민 씨를 생각했어요. 원작 만화와의 싱크로율을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박정민 씨는 영탁이랑 닮았어요. 또 영탁이가 마지못해하는데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정민 씨 연기가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무빙’에도 카메오로 출연시키고 싶었지만 여건상 안 됐던 거였죠.”
이처럼 ‘조명가게’는 ‘무빙’에 이어 디테일을 파고드는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13년 전 웹툰이 드라마로 재조명받고 웹툰까지 다시 인기를 얻는 비결은 무엇일까. “재밌는 이야기라서 아닐까요. 저는 1995년에 봤던 ‘모래시계’가 아직도 제일 재밌어요. 작가로서 제 작품도 그렇게 되길 바라는 욕심이 분명히 있어요. 10년 후에 딸, 아들이 커서 보더라도 ‘재밌었네’라는 말을 듣고 싶어요. 그런 드라마를 하고 싶었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 흥미로운 이야기의 저력은 온갖 군상을 촘촘히 다루는 데서 온다. “제가 만화가인데 그림을 잘 못 그려요(웃음). 항상 이야기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야기는 누구나 쓸 수 있어요. 결국 보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작품에서 내용이 기억나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면 성공했다고 늘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에도 다양한 인물 한 명 한 명에 힘을 실으려고 했어요.”
이제야 극작가를 자신의 또 다른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중이다. 작품의 성패를 오롯이 혼자 책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두렵지만, 당분간 극본을 쓰는 일에 몰두할 계획이다. ‘재밌으니까’, 천생 이야기꾼다운 이유다. “‘무빙’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잠깐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만화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단 ‘무빙2’ 극본을 써야 하는 상황인 거죠. 잘 모르겠어요. 힘들 때마다 만화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도 있어요. 확실한 건 극본 쓰는 일이 너무 재밌어요. 시작했으니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