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루엔자(독감) 환자가 빠른 속도로 늘면서 지난 2016년 이후 최대 규모의 유행세를 보이고 있다. 동네 이비인후과 병원을 주로 찾는 경증환자는 소폭 줄어든 모습이지만,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대학병원은 비상에 걸렸다. 전문가들은 인플루엔자 외에 다른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 감염도 잇따르고 있다며 이번 설 연휴가 고비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2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이달 첫째 주(2024년 12월30일~2025년 1월5일) 표본감시 의료기관을 찾은 외래환자 1000명당 인플루엔자 증상을 보인 의심환자 수는 99.8명을 기록했다. 전주의 73.9명보다 1.4배 늘었고, 4주 전에 비하면 13.7배 불어났다. 이달 첫째 주에 2016년(86.2명) 이후 8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했는데 환자 증가세가 꺾이지 않고 있다. 특히 13~18세 청소년층에서 1000명당 177.4명, 7~12세에서 161.6명이 나타나며 학령기 아동·청소년이 유행의 중심에 있다.
지영미 질병관리청장은 9일 열린 ‘3차 호흡기감염병 관계부처 합동대책반 회의’에서 “기온이 떨어지고 인플루엔자 감염 환자가 예년에 비해 크게 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호흡기 감염병의 동시 유행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라며 “과거 동절기 인플루엔자 유행 추세가 겨울방학 직전 최고치를 기록한 후 방학이 시작되는 1월 이후 서서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 점을 고려하면 향후 1~2주 뒤에 유행의 정점을 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질병청 전망대로라면 설 연휴가 최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인플루엔자 말고도 다른 급성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이 동시에 유행하는 ‘멀티데믹’ 현상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흡기 세포 융합 바이러스(RSV), 코로나19, 사람 메타뉴모 바이러스(HMPV)의 확산세가 겹쳐 호흡기 바이러스 질환 4개가 동시에 유행하고 있다. 질병청에 따르면, 기침·고열 등을 동반하는 RSV는 입원 환자 수가 지난해 10월부터 급증하기 시작해 지난달 마지막 주에 603명을 기록했다. 중국에서 대유행하고 있는 HMPV는 지난달 마지막 주에 입원 환자 수가 183명으로 2주 만에 2.2배 뛰었다. 코로나19도 지난달 마지막 주 입원 환자가 113명으로 일주일 만에 71% 늘었다.
이 때문에 병원들은 호흡기 환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대학병원의 응급실 환자나 전화 문의의 절반이 독감과 관련돼 있을 정도다. 남궁인 이대목동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난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머니가 식사를 못하신다’ ‘아버지가 걸음을 못 걷는다’ ‘친구가 기절했다’ 등 여러 사례들이 모두 독감 때문에 일어났다”며 “팬데믹의 영향으로 그동안 잠잠하던 바이러스들이 한꺼번에 유행하고 있으며, 모든 호흡기 바이러스는 급성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독감으로 입원하는 환자 수는 표본 의료기관 기준 올해 1452명이다. 이는 지난해 초반 795명의 1.8배 수준이다. 독감 환자는 지난해 말부터 눈에 띄게 증가했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로 인해 밀접·밀폐·밀집의 ‘3밀 환경’이 조성됐고, 백신 접종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A형 독감 유형 중 H1N1, H3N2 2개가 같이 유행하는 이례적인 상황도 유행 규모를 키운 요인 중 하나다. 복수의 독감 유형이 한꺼번에 유행한다는 것은 독감에 한 번 걸렸더라도 또다시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2~3주 간격으로 두 번 독감에 감염된 사례가 확인되고 있으며, 2월 이후에는 B형 독감이 유행할 가능성도 있다.
병원들은 심상치 않은 확산세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경기 수원시 이비인후과 의원 A원장은 “지난주에 수십 명씩 나오던 독감 환자가 이번주 화요일부터 줄긴 했다”면서도 “A형 독감이 유행의 대세를 이어오다가 B형 독감이 나오기 시작했다. 1~2주 뒤엔 B형 독감이 유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경기 고양시 이비인후과 의원 B원장은 “독감 대유행에 따른 치료제 공급 부족이 잠깐 있긴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해소된 상태”라며 “다만 코막힘 증상 완화 등에 쓰이는 슈도에페드린 제제나 어린이용 시럽제 등 평소에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던 의약품들은 수급이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이번 유행이 예년보다 길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백신 접종과 개인 위생수칙 준수를 강조했다. 박대원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65세 이상 고령자, 임신부, 어린이 등 고위험군이 인플루엔자에 걸리면 폐렴, 심근경색, 뇌졸중 등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지금이라도 백신을 접종하면 봄까지 효과가 지속되는 만큼 반드시 맞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독감 예방 접종 효과는 접종 후 약 2주 후 나타난다.
그러면서 “발열, 근육통, 콧물, 기침 등의 증상이 있으면 병·의원을 방문해 의사의 진단을 받고 약물을 복용해야 한다”며 “이 기간에는 충분한 휴식과 수분 섭취가 중요하고, 외출이 불가피하다면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