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장기 기증이 이를 가능케 한다. 생명을 나누는 장기 기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세상에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은 수년의 시간을 힘겹게 버티며 기적을 꿈꾸지만 기증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쿠키뉴스는 4편에 걸쳐 생애 마지막 순간 고귀한 나눔을 실천한 이들과 새로운 삶을 건네받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장기 기증의 숭고함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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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인호(65·가명)씨는 혼자 사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콩팥 상태가 좋지 않아 투석을 받으며 지내다가 지난 2023년 12월 뇌사 장기 기증을 받게 됐다. 이식 후엔 면역억제제를 복용하면서 건강관리에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결국 수술한 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이식받은 콩팥의 기능은 악화돼 있었다. 의료진은 김씨를 위해 병원 사회사업팀과 연계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했다. 김씨는 “이때 기증받은 장기가 아깝지 않도록 변해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이후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식사와 약을 제때 잘 챙겨먹으면서 운동을 하는 등 생활을 개선했다”고 말했다. 김씨의 주치의인 박연호 가천대 길병원 장기이식센터장은 “장기 이식은 단순히 못 쓰는 장기 하나를 교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며 “장기 기증이 활성화돼 절망에 빠진 많은 사람이 희망을 찾고 인생의 변화를 이루길 바란다”고 짚었다.
장기 기증을 희망하는 사람은 늘고 있지만 많은 환자가 기증자를 기다리던 중 숨을 거두고 있다. 장기 기증에 대한 홍보 및 인식 부족, 가족의 동의를 얻어야 기증이 가능한 ‘옵트인(opt-in)’ 제도 등이 기증 활성화를 가로막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장기 기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얻고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증의 발목을 잡는 장벽들을 해소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장기 기증율 100만명당 8.68명…가족 동의 없인 불가능
한국은 본인이 장기 기증을 희망하더라도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기증이 불가능하다. 옵트인 제도가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장기 기증 선진국으로 꼽히는 나라들은 ‘옵트아웃(opt-out)’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옵트아웃 제도를 시행하는 국가에선 모든 사람이 잠재적 장기 기증 대상자다. 기증을 거부할 경우 따로 신고를 해야 한다. 기증을 특정한 사람의 선택이 아닌, 시민의 보편적 의무로 보는 것이다. 보건복지부 국립장기조직혈액관리원(KONOS)에 따르면 스페인의 경우 2019년 기준 인구 100만명당 장기 기증율이 48.9명이다. 한국은 8.68명에 그쳤다.
미국도 옵트인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한국과 비교해 기증율이 월등히 높다. 미국의 인구 100만명당 장기 기증율은 36.98명이다. 미국은 운전면허증을 신청할 때 장기 기증 희망 여부를 선택하는 항목이 있다. 또 50개 주에 60개가 넘는 장기조달기구를 둬 의료기관 간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기 기증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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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기 은평성모병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 장기이식병원장(혈관이식외과 교수)은 “생체 장기 기증(가족 간 기증) 건수는 세계에서 1~2위를 다투지만 뇌사 장기 기증은 한참 부족한 수준”이라면서도 “우리의 국민 정서나 의료 시스템을 고려할 때 옵트아웃 제도로 전환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이라고 했다. 황 원장은 “미국처럼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을 발급·갱신할 때 기증 희망 여부를 체크하도록 하면 불의의 사고로 뇌사에 빠졌을 때 가족의 기증 결정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 16세 이상이라면 KONOS 홈페이지를 통해 장기 기증 희망등록을 신청할 수 있다. 병원 장기이식센터를 직접 방문하거나 우편을 이용할 수도 있다. 희망등록을 마치면 증명증과 함께 신분증에 붙일 수 있는 스티커가 지급된다. 고은진 은평성모병원 장기이식 코디네이터는 “뇌사에 빠진 가족의 주민등록증에 기증 희망등록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기증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희망등록 접근이 더 수월해지면 기증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DCD 도입 지지부진…“기증 부족 해소 기대”
의료계에선 ‘순환정지 후 장기 기증(DCD)’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DCD 제도는 심정지 환자 본인의 사전 동의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고 5분간 기다린 후 전신의 혈액 순환이 멈췄을 때 장기를 적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한국의 장기이식법은 뇌사자 장기 기증 절차만 규정하고 있을 뿐 심정지로 사망한 사람에 대한 기증 절차가 마련돼 있지 않다. 반면 미국, 스페인 등은 전체 장기 기증의 3분의 1 이상이 DCD를 통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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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회에는 장기 기증을 할 수 있는 자의 범위를 현행 뇌사자에서 연명의료 중단자까지 넓히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형 DCD 제도가 담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현행 장기이식법에 따르면 장기 적출이 가능한 범위는 살아있는 사람(신장 등 일부 장기), 사망자, 뇌사자로 제한돼 있다.
그동안 연명의료를 중단해 사망한 자가 장기이식법상 적출이 가능한 사망자인지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이에 한정애 의원은 개정안을 통해 ‘연명의료 중단으로 사망한 자’를 장기 적출이 가능한 범위에 포함시켰다. 연명의료 중단으로 사망한 자의 사망 시각은 연명의료 중단 후 혈액 순환과 호흡이 중단한 지 5분이 경과한 때로 정했다.
박연호 센터장은 “심장이 멈춰서 사망한 환자의 장기도 이식이 가능해야 한다. 심장이 멎었더라도 콩팥은 최대 12시간, 간은 2시간 안에 적출하면 이식할 수 있다”면서 “뇌사 장기 기증 건수가 정체돼 있다. 특히 작년에 의정갈등 사태의 영향으로 인해 건수가 급감해 예전 수준을 회복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DCD 제도가 도입되면 기증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황정기 병원장도 “DCD 도입을 위한 대한이식학회와 복지부 간 논의는 수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며 “심장사 기준을 어떻게 마련해 선언할 것인지가 중요한 과제다. 심장사 기증 절차까지 마련된다면 뇌사 기증과 합쳐 장기 기증 건수가 훨씬 늘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부정적 인식 여전…“사회적 예우 강화돼야”
전문가들은 제도 마련도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이 돼야 할 건 국민들의 인식 변화라고 강조했다. 뇌사 기증이든 심장사 기증이든 결국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실행될 수 없다. 장기 기증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기증자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높아져야 한다.
김태현 한국기증자유가족지원본부 이사는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는 뜻으로 자식을 잃은 슬픔을 비유하는 말이다”라며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기증자 유가족은 슬픔에 빠져 죄인처럼 산다.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줘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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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성모병원은 뇌사 장기 기증자를 위한 위령미사를 봉헌하고, 장기 이식병원에 기증자의 이름과 기증 내용 등을 기록한 ‘기억의 벽’을 조성하는 등 기증자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황정기 병원장은 “병원에서 기증을 기리며 유가족에게 매달 편지를 보내고 있으며 매년 11월엔 유가족, 수혜자, 의료진 등이 함께 미사를 드린다”라면서 “기증자에 대한 예우가 더욱 강화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장기 기증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차단하고 부정적 인식을 해소할 필요도 있다. 박연호 센터장은 “유교적·불교적 사상 때문에 신체 장기를 떼어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아직 크다.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장기 밀매를 극중 소재로 다루는 것도 부정적 인식이 형성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면서 “장기 기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형성하기 위한 교육은 일반 국민뿐 아니라 의료진에게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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