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화상투약기)의 품목 규제가 숨통을 트고 있는 가운데 소비자들은 환영했다. 반면 약사들은 국민 건강에 위험한 결정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31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국무조정실 신산업규제혁신위원회(규제혁신위)는 지난 25일 규제샌드박스 과제에 대한 이견 조정 회의를 거쳐 화상투약기 약효군을 확대하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규제특례위원회에 권고했다. 확대 권고 대상은 현행 11개에서 사전피임제, 수면유도제, 건위소화제, 외피용 살균소독제, 청심원제 등 13개 약효군을 추가한 24개다.
화상투약기는 약국이 문 닫는 새벽 시간대나 주말에 약사와 화상통화로 상담·복약지도 후 일반의약품을 구매할 수 있는 기계다. 2022년 6월 규제샌드박스 특례를 부여받아 2023년 3월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업체는 ‘쓰리알코리아’로 현재 8대의 화상투약기를 운영하며 53개 품목을 판매하고 있다.
규제혁신위는 화상투약기 약효군 확대에 이어 약국이 없는 농촌 등 격오지에 한해 약국 외 장소에 화상투약기 설치를 허용하는 추가 권고안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반려동물 처방이 가능한 인체의약품에 대해 수의사가 직접 약품을 구매·처방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보기로 했다. 다만 한약사가 개설한 약국에도 화상투약기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한의계의 요구에 대해선 ‘불허’ 결정을 내렸다. 규제혁신위 관계자는 “약효군을 확대하더라도 국민 건강과 안전상 우려가 크지 않고,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과 편의성, 경증 환자의 응급의료 혼잡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은 정부의 이번 결정을 반겼다. 경기 파주에 거주하는 김석현(36·가명)씨는 “얼마 전 새벽에 심한 몸살과 복통을 겪었는데, 약국이 모두 문을 닫아 약을 살 수 없었고 응급실을 가기엔 부담이 커 끙끙 앓았던 경험이 있다”며 “화상투약기 확대는 약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자녀를 둔 경기 의정부에 사는 이지현(37·가명)씨는 “아이가 갑자기 열이 오를 때가 종종 있는데 (화상투약기 확대는) 아이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반가운 소식”이라며 “어린이용 약도 안전하게 구입할 수 있도록 복용법과 주의사항을 충분히 안내해주는 시스템이 함께 마련되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소비자단체는 약국, 병원이 적은 도서지역에 화상투약기가 늘어나면 주민들의 의약품 접근성이 높아질 것으로 평가했다. 이정수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은 “도서지역은 심야약국을 찾기 어렵고 접근성도 떨어져서 주민들의 불편이 크다”면서 “의료시설이 부족한 격오지는 허들을 낮춰 화상투약기 설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약사들은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고려해야 하는 의약품까지 기계를 통해 판매하는 위험한 상황이 초래됐다”며 화상투약기 품목 확대 권고 결정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서울특별시약사회는 28일 성명을 통해 “이번 조치는 공중보건 체계를 훼손하고, 약사의 전문성을 약화시키며 국민의 복약 안전성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약준모)은 “인체용 의약품의 불법 유통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약준모는 성명을 내고 “약국 외 장소에서 의약품을 판매할 수 없다는 약사법까지 무시하는 규제혁신위의 월권행위는 결코 묵과할 수 없다”면서 “의약품을 세계에서 가장 느슨하게 다룬 결과 길거리에 ‘펜타닐 좀비’가 넘쳐나는 미국이 규제혁신위가 꿈꾸는 미래란 말인가”라고 비꼬았다.
전문가들은 심야나 응급 상황에서 의약품을 신속하게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화상투약기 규제 완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안전한 사용을 위한 보완책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짚었다. 수도권 약학대학 A교수는 “사전피임제, 수면유도제 등은 오남용 우려가 커 연령 및 건강 상태에 따른 구매 제한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라며 “편의성은 높이되 국민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균형 잡힌 정책이 추진되길 바란다”고 피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