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40세 A씨는 2019년 자궁내막증 수술을 받은 이후 6개월마다 검진을 받아왔다. 검진 때마다 실손의료보험금을 청구하려면 병원에서 진료비 영수증과 세부내역서를 발급받아 휴대전화로 촬영한 뒤 보험사에 보내야 했다. 설계사에게 따로 연락해야 하는 절차가 번거로워 보험금 청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매번 함께 부담하던 6만원 남짓의 약제비 역시 별다른 안내를 받지 못해 청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최근 실손의료보험 청구 전산화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A씨는 ‘실손24’ 앱을 통해 진료 후 별도의 서류 발급 없이 한 번에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었고, 그동안 놓쳤던 약제비까지 청구 대상이라는 안내를 받아 보험금을 지급받았다. 그는 “이렇게 간편한 제도가 있는 줄 몰랐다”며 “왜 이제야 알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실손 청구 전산화는 소비자가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은 뒤 실손24 앱(웹사이트)을 통해 보험금을 청구하는 제도다. 과거 병원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보험사에 제출해야 했던 절차를 대폭 줄인 것이 핵심이다.
실제로 청구 절차는 단순하다. 이용자가 본인 인증을 한 뒤 보험사와 병원을 선택하고 진료 내역을 확인해 전송 버튼을 누르면, 병원 전산망에서 생성된 진료비 정보가 자동으로 보험사로 전송된다. 영수증을 따로 촬영해 업로드할 필요도 없다. 다만 고액 진료비나 장기 입원 등 규모가 큰 청구 건은 보험사가 진단서 등 보완 서류를 요구할 수 있다.
확산 속도도 빠르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월 기준 실손24 누적 가입자는 178만명, 누적 청구 건수는 60만건이다. 전체 실손보험 가입자(4048만명)의 약 5% 수준이다. 절대적인 규모는 아직 크지 않지만, 시행 초기 대비 이용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평가다.
의료기관 참여율 22%…“홍보·유인 부족”
다만 실손24와 연계된 의료기관은 아직 제한적이다. 전국 요양기관은 병원급 의료기관·보건소(8000여 곳)와 의원·약국(9만7000여 곳) 등 총 10만5000여 곳이다. 이 가운데 지난달 25일 기준 실손24와 연계된 기관은 2만3102곳으로, 전체의 22% 수준에 그친다.의료계 내부에서는 시각 차가 엿보인다. 일부 대형 병원을 중심으로 참여가 늘고 있지만, 이미 민간 핀테크를 통해 간편 청구를 이용하는 의료기관이 적지 않아 국가 주도 시스템으로 굳이 전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견도 여전하다. 환자의 보험금 청구 편의를 위해 특별 보상 없이 추가 행정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는 점 역시 참여를 망설이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의사의 최우선 과제는 환자 건강이고, 실손보험 계약은 환자와 보험사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의사는 제3자인데 청구 업무까지 떠안으라고 하면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는 것과 같다. 이미 의료 현장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어 추가 행정 부담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어 “지금도 병원에서 환자들의 실손보험 청구를 충분히 돕고 있으며, 환자들이 제대로 청구를 못 받는 일이 없다”고 부연했다.
동네 병원(의원급)의 관심은 더 낮다. 의원급 참여율은 11%에 그친다. 제도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불이익이 없어서다. 인천의 한 개인의원 원장은 “실손24는 강제 조항이 아니고, 병원에 홍보나 연계 방법에 대한 지침도 내려온 적이 없다”며 “큰 병원은 아무래도 나라 눈치를 봐야해 참여할지 모르겠지만, 개인 병원에서는 굳이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실손24도 여러 보험금 청구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참여하지 않는 곳에 대한 제재가 사실상 없다는 점이 전산화를 늦추는 가장 큰 요인”이라며 “과태료 등 패널티가 없다 보니 참여 유인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약국은 비교적 적극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앞서 대한약사회는 추가 업무에 따른 행정 부담과 환자 정보 유출에 따른 보험사의 무분별한 활용 가능성 등을 이유로 실손 청구 간소화 제도 도입에 반대해 왔다. 다만 대한약사회는 제도 시행 직전인 지난 10월 보도자료를 통해 “실손24는 데이터 암호화와 전자서명, 암호화 전송 등 고도화된 보안 기술을 적용해 개인정보 침해와 데이터 독점 우려를 최소화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약국은 별도의 행정 업무 부담 없이 청구가 가능해 업무 효율이 높아지고 민원도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참여 속도도 빠르다. 시범사업 초기인 10월 2일 참여 약국은 1곳에 불과했지만, 10월 24일 4199곳, 10월 31일 6680곳으로 늘었고, 한 달여 만에 7700곳을 넘어섰다. 실손24와 연계된 한 약국 관계자는 “연동 과정이 어렵지 않아 프로그램에서 몇 번만 클릭하니 바로 됐다”며 “약국은 대부분 참여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실손 청구 간소화를 한 번 경험한 소비자들은 제휴된 약국을 계속 찾게 될 텐데, 굳이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EMR 업체가 또 다른 변수…수수료 갈등에 연계 지연
업계 안팎에서는 실손 청구 전산화 확산을 늦추는 핵심 변수로 EMR(전자의무기록) 업체를 꼽는다. EMR은 병원의 환자 진료·검사 정보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을 운영하는 업체로, 실손 청구 간소화 시스템을 구축·운영하기 위해서는 EMR 업체의 참여가 필수적이다.그러나 일부 대형 EMR 업체가 수수료 문제 등을 이유로 참여를 미루면서 연계율이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확산비와 유지보수비 등 각종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고 있음에도 일부 업체가 청구 건당 1100원의 수수료를 요구하며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의료기관 참여 확대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EMR 시장은 주요 3개 업체가 시장점유율 약 50%를 차지하는 과점 구조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EMR 시장에서 주요 업체들의 비중이 큰 만큼 이들의 협조 없이는 연계율을 끌어올리기 어렵다”며 “이 점이 실손 청구 간소화 확산을 늦추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이들 업체는 협상 과정에서 영수증 장당 250원의 전송 수수료 등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보험사 관계자는 “모든 의료기관이 시스템을 사용하고 청구가 최대치로 발생한다는 가정 아래 계산한 수치이긴 하지만,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질 경우 연간 1000억원이 넘는 수수료 지급이 발생할 수 있다”며 “결국 보험사의 사업비 부담으로 이어져 실손보험 손해율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EMR 업체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초기 시스템 구축 비용뿐 아니라 지속적인 유지·관리 비용에 대한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한 EMR 업체 관계자는 “EMR 업체는 연동 요청이 오면 지원하는 중간 역할일 뿐 간소화 시스템 확산의 주체가 아니다”라면서도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수수료가 적당하고 적절한가에 대한 의구심은 있다”고 설명했다.
EMR 업체들은 기존 민간 핀테크 업체들이 이미 실손보험 전산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관계자는 “이미 많은 의원이 민간 핀테크 서비스와 연동해 사용하고 있다”며 “(정부 주도의) 새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기존 업체의 사업 타격과 변경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병원급은 연동이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의원급은 기존 서비스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아 전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곳도 적지 않다”며 “EMR 업체가 의원을 찾아가 새 시스템 도입을 적극 설득할 유인도 크지 않다”고 했다.
보험업계는 이런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 보험업계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기존 핀테크 업체를 통해 실제로 청구하는 건수는 제한적”이라며 “실손 청구 전산화는 기존 방식이 충분히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입된 제도”라고 강조했다.
금융당국 역시 비슷한 시각을 보이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핀테크를 통해서도 실손 청구 전산화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지만, 해당 서비스들이 법에서 요구하는 요건을 실제로 충족하는지는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보험 계약자가 요양기관에 관련 서류 전송을 요청할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이에 응해야 한다는 법 조항이 있는데, 핀테크 업체가 보험사로 서류를 전자적으로 전송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