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취약자 늘지만…재산 보호 신탁은 ‘제자리’

인지취약자 늘지만…재산 보호 신탁은 ‘제자리’

대안으로 떠오른 신탁…현실에선 주변부
장애인특별부양신탁, 세제 혜택에도 활용 저조
후견신탁도 문턱 높아…절차·비용 부담

기사승인 2025-12-31 15:15:06
그래픽=한지영 디자이너

초고령사회 진입으로 인지취약자의 재산 관리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신탁 제도는 현장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제 혜택까지 마련돼 있지만 인출 제한, 복잡한 후견 절차, 높은 비용 부담이 겹치면서 ‘있어도 쓰기 어려운 제도’로 남아 있다는 지적이다.

31일 보험연구원의 ‘국내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의 현황과 제도개선 방향’에 따르면, 의사결정 능력에 제약이 있는 국내 인지취약자는 핵심 관리 대상 기준으로 약 220만명에 이른다. 치매 환자, 중증 인지 질환자, 발달·정신장애인이 포함된 수치다. 치매와 정상 노화의 중간 단계로 분류되는 경도인지장애 고령자까지 더하면 규모는 약 520만명으로 확대된다.

인지취약자 인구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치매 및 경도인지장애 인구는 2024년 약 395만명에서 2050년 795만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고령사회 진입과 함께 인지취약자의 재산 관리 수요 역시 빠르게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흐름에 대응해 한국은 2013년 성년후견제도를 도입했다. 치매와 뇌손상 장애, 발달·정신장애 등으로 의사결정 능력이 제한된 사람이 자기결정권과 잔존 능력을 존중받으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다만 제도 취지와 달리 실제 운용 과정에서는 한계가 뚜렷하다. 가족 중심의 부양 문화 탓에 성년후견인 이용 자체가 적고, 후견인이 선임되더라도 가족·친족이 맡는 비중이 과도하게 높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후견 사건 누적 신청 건수는 12만8000건에 그쳤다. 이 중 가족·친족이 후견인으로 선임된 비중은 약 85%에 달한다. 재무적 후견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고, 경제적 착취를 예방하기 힘든 구조라는 지적이 나온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 세제 혜택에도 활용 저조

대안책으로는 신탁이 거론돼 왔다. 신탁은 자산을 전문 기관에 맡겨 위탁자가 정한 목적에 따라 관리·운용하고, 그 수익과 자산이 특정 수익자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는 제도다. 위탁 목적에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설계할 수 있고, 수탁기관의 전문적 자산 운용을 통해 관리 효율성도 높일 수 있다. 여기에 신탁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제한돼 인지취약자 재산을 보호하는 수단으로도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신탁 역시 기대만큼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 신탁 시장이 그동안 대형 금융사를 중심으로 수익성이 높은 상품 위주로 성장해 온 탓에, 인지취약자의 자산 보호를 목적으로 한 신탁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대표적인 제도가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이다. 장애인을 수익자로 설정한 신탁에 대해 최대 5억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해 주는 구조지만,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다. 업권에서는 제도 설계 자체가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은 원칙적으로 신탁 원본 인출이 금지돼 의료·간병·특수교육비 등 제한적인 용도만 허용된다. 저금리 환경에서는 운용 수익만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기 어렵다. 자산 가치가 감소할 경우, 오히려 증여세가 부과될 수 있어 실질적인 생애 부양 수단으로 활용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은 1989년 도입 이후 2018년까지 누적 설정 건수가 36건, 수탁고는 155억원에 그쳤다. 

후견신탁도 문턱 높아…절차·비용 부담

치매 고령자를 주요 대상으로 하는 후견신탁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법정후견인 선임 이후에만 설정이 가능하고, 후견 개시부터 신탁 설정·운용 전 과정에서 법원 판단을 거쳐야 해 평균 5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여기에 후견인·감독인 보수와 공증 비용까지 더해지면서 비용 부담이 상당하다.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공후견 서비스의 경우, 전문성과 지속성이 부족해 이용률이 부진한 상황이다. 이 탓에 후견신탁은 금융사별 설정 건수가 5건 미만에 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금융사 입장에서도 인지취약자 신탁은 수익 대비 부담이 큰 영역이다. 취약계층 보호라는 복지 목적이 강한 반면 수수료는 낮고, 관리 부담과 법적 리스크는 크기 때문이다. 이 같은 제약으로 현재 민영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은 소수의 고자산층 가구에 집중돼 있다. 장애인특별부양신탁은 경직적인 인출 구조를 감당할 수 있는 자산 여력이 있는 가구에 적합하고, 후견신탁 역시 신탁 비용과 장기간 후견인 수수료를 부담할 수 있는 고자산층 치매 고령자에게 주로 선택된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이는 민영 신탁이 비용과 위험을 자체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민영 신탁만으로는 중·저자산층 인지취약자의 수요를 포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인지취약자 신탁을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은영 보험연구원 연구위원은 “민영 부문의 인지취약자 지원 신탁이 보다 대중적인 자산 보호·관리 수단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특별부양신탁의 인출 규제를 유연화하고, 후견신탁 이용 환경을 개선하는 한편 금융기관의 관리형 신탁에 대한 자산운용 규제를 완화해 시장 참여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공공신탁 시범사업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도 적격 대상자 범위를 확대하고, 지자체와 지역 금융기관의 역할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담 인력 육성과 대중 인식 제고를 위한 적극적인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미현 기자
mhyunk@kukinews.com
김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