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2년 전 지방의 한 부장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유서 형식으로 이런 글을 남겼다. “판사는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토하거나 배설한 것을 치우는 쓰레기 청소부와 같은 역할을 한다. …판사는 의심하는 직업이다. 아내와 부모님 말마저 의심하게 하는 끔찍한 직업병이다.”
최고의 엘리트로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판사들. 거대 재벌 총수도 간단히 구속하며 재벌들을 벌벌 떨게 하는 힘을 지녔지만 그들도 말 못할 고통과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흉악범이나 대형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형사부 판사들의 트라우마는 더욱 심하다.
재경 법원의 한 형사합의부 판사는 “성범죄나 살인 등 잔인한 사건을 심리할 때 가장 고통스럽다”고 했다. 흉악범 재판에서는 잔혹한 행위들을 적나라하게 접할 수밖에 없다. 이 판사는 “언론에는 차마 보도될 수 없는 끔찍한 일들도 법정과 사건기록에서 접해야 한다. 며칠씩 그 잔상이 남아 악몽을 꾼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흉악범들은 중형을 선고하는 판사를 살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볼 때가 있다. 그때도 판사들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하지만 그 눈빛의 살기는 두고두고 남아 괴롭힌다고 했다.
한 여성 판사가 겪었던 에피소드도 회자된다. 형사부에 근무했던 여판사는 임신한 상태에서 변사사건 기록에서 끔찍한 사진을 봐야 하고, 수많은 성폭행 사건을 접하면서 매일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혹시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까 늘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나 밝게 자라고 있지만 형사부 여판사들의 고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판사들은 어린 청소년 범죄자를 선고할 때 인간적 고뇌에 시달린다고 했다.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풀어주고 싶지만 판결은 감정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과 손이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최근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를 살해한 지모(19)군에게 실형을 선고한 조경란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법정에서 눈물을 흘렸던 것도 그런 이유다. 조 부장판사는 “선고 며칠 전부터 그 아이에게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형사부 판사들은 가정에서 잔소리꾼이 된다고 푸념한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범죄들을 접하다 보니 자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한 배석판사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자주 보게 되니까 집에 가서도 ‘아이들 잘 챙겨라’ ‘문단속 잘해라’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며 잔소리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요즘 성폭행범 등 흉악범의 형량을 높이라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유죄를 선고하는 순간 형량도 높아지기 때문에 유무죄를 더 엄격하게 따지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피해자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 성폭력 사건은 더욱 까다로워졌다고 토로한다. 유죄를 확신하기 어렵다고 무죄를 선고했다가는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기 때문이다. 성폭력 전담 재판부의 한 부장판사는 “최대한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보려 해도 유죄를 선고하기 힘든 사건이 있다”며 “그런데도 법원이 너무 관대하다고 비난하면 정말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개운치 않은 판결을 하고 나면 여론에 신경이 곤두서고, 항소심에서 뒤집히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2009년 법원복지센터를 서울고법에 설치했다. 판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심리상담 등을 위해서다. 그러나 법원 직원들의 이용률은 매년 늘지만 판사들의 이용 실적은 거의 없는 상황이다. ‘F코드’(정신질환을 분류하는 코드)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한 판사는 “판사가 심리상담을 했다는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 그 재판부의 최종 결정을 누가 신뢰하겠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판사들도 우울해지면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업무스트레스 등에 따른 우울증으로 두 번이나 자살을 하려 했던 한 부장판사는 “일부 과격한 시민단체는 재판 중에 전화로 협박하기도 한다”며 “정말 고심해서 선고를 해도 판사가 편향적이니 하면서 일방적으로 매도할 땐 상처를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이젠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내공’이 생겼다는 그는 “그냥 감기 같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상담이나 치료를 받고,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