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가습기 살균제라는 블랙홀이 삼킨 것

[기자수첩] 가습기 살균제라는 블랙홀이 삼킨 것

기사승인 2017-06-09 00:10:00

영화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2014)에서 탐사대의 첫 도착지는 ‘밀러행성’이다. 영화에서 이 행성은 물이 많아 생명체가 있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거대 블랙홀을 공전하는 탓에 기묘한 현상이 수시로 발견되는 ‘물의 불모지’로 묘사된다. 이곳에서의 1시간은 지구의 7년으로, 산만큼 높은 파도는 탐사대를 심각한 위협에 빠뜨린다. 밀러행성을 죽음의 행성으로 만든 치명적인 블랙홀은, 그러나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면역력이 약한 유아와 산모를 공격하고 그 가족들을 고통의 시간 속에 영원히 빠뜨리고만 블랙홀, 가습기 살균제 이야기다.    


[쿠키뉴스=김양균 기자] 8일 <네 살 현서가 죽은 이유 하느님은 아신다> 제하의 기사를 준비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사태 해결 의지와 이를 바라보는 피해자의 ‘바람과 희망에 찬 시선’을 조망하는 것이 최초 기획 의도였음을 고백해야겠다. 피해자 조중민(43·가명)씨의 오랜 회한과 절망을 보면서 ‘현재’ 그에게 희망을 찾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의 책임’을 말한다. 언론은 피켓을 든 가습기 피해자들이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에 기뻐했다고 기사를 쓴다. 난 허탈감을 느꼈다. 수년간 숱한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었다. 다분히 정략적인 제스처에 기대를 갖고 기뻐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 슬프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죽었던 아이가 살아 돌아오거나 슬픔이 가시겠는가. 과연 그렇겠는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나라, 가족을 잃은 이들이 묻는다. 가습기 참사를 두고 누구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있는가. 정부 산하 다수의 기관과 단체, 조직은 도대체 무얼 했는가. 정부는 왜 대답하지 않는가. 이에 누군가가 답할지 모르겠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정부를 탓하느냐, 정부가 무슨 죄냐. 

나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세월호의 그림자를 본다. 보라. 여기 두 아버지가 있다. 자식을 태운 배가 바다 한 가운데 침몰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이와 미세한 물의 입자에 자식을 잃은 아비가 있다. 앞은 ‘세월호’이고 나중의 것은 ‘안방의 세월호’이다. 이들은 기업과 미디어, 정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다. 비슷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진상 규명은 온데간데 없는 것이나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피해자를 조롱하고 매도했던 것도 똑같다. 강단에서 피해자를 조롱하는 교수나 기업의 돈을 받아 이른바 ‘청부 연구’를 떡하니 내놓은 학자들, 그리고 이를 용인한 대학, 정치인, 악의적 프레임으로 흠집내기에 일관하거나 ‘경제 논리’를 운운하며 가해자의 손을 들어준 언론까지 ‘치명적인 블랙홀’의 내부는 온통 시꺼먼 그을음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밀러행성과 다르지 않다. 사람이 사람을 부정하는 곳. 부정당하는 나라.   

조중민씨의 막내딸은 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지나치듯 슬쩍 언니가 있었노라 말해준 게 전부다. 그러나 보름달이 뜨면 아이는 한번도 본 적 없는 ‘현서 언니’를 찾는다. 그런 막내딸이 올해 여섯 살이 됐다. 이제 산 아이는 죽은 아이보다 나이가 많다. 오는 20일은 죽은 딸아이의 생일이다. 세월이 흘러 막내딸이 성인이 되었을 때, 매년 6월 20일을 어떻게 기억할지 나는 두렵다. 국가가 언니를 지켜주지 않았다는 분노가 남아있을까봐 걱정이 된다. 

아직은 견고한 블랙홀이 그때쯤이면 쪼그라들어 더 이상 흔적도 남아있지 않길 희구한다. 블랙홀이 피해자들에게서 빼앗아가 멈춰버린 시간도 다시 흘러가길 소망한다. 어른이 될 아이가 살아갈 곳은 ‘물의 불모지’ 밀러행성이 아닌, 사람의 땅이길 바라마지 않는다.    

angel@kukinews.com

김양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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