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트폭력과 스토킹의 사회적 문제점과 법률안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 행위에 대한 판별 기준이 불분명하고, 폭력행위를 인지한 의료인이나 구급대원 등에게 신고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질병관리본부가 2022년까지 결핵발생률을 절반수준으로 낮추기 위해 제시한 제2기 결핵관리 종합계획(안)이 실현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특히 채용 직후의 결핵검진 시행, 잠복결핵감염 검진 및 치료 강화에 대한 법률 개정안과 함께 결핵관리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자유한국당 김명연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이 한의사의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 사용을 허용하도록 대표발의한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과 대한약사회, WHO가 주장ㆍ권고하는 의약품 성분명 처방은 환자의 안전성을 저해할 수 있어 반대합니다.”
이 외에도 대한의사협회(회장 추무진)는 ▶양ㆍ한방협진 2차 시범사업 ▶의료기관 제증명수수료 항목과 상한액을 정한 복지부 고시개정 ▶자유한국당 송석준 의원이 대표발의한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지난 9월 한 달 동안 정부와 국회, 약사회와 한의사협회가 요구하거나 추진한 제도적, 정책적, 법률적 개선안 7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히며 날을 세운 것.
여기에 올해에만 문제인 케어와 현행수가체계 비판, 최저임금 상승에 따른 의료기관 운영 우려, 의료사고 피해구제법과 환자안전법 시행에 불만을 쏟아내며 십여 건의 개선책에 반대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왜 의사협회로 대변되는 의사들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 중심에 ‘전문가주의(professionalism)’가 있다.
◇ “전문성… 엄격한 기준과 권한, 책임의 산물”
전문가주의는 전문직의 특성이나 태도, 사회적 역할과 위치를 뜻하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사회학자들은 ‘전문직’을 복잡한 지식과 술기를 습득하고,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지속 발전시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소명을 갖는 이들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구조기능주의적 관점에서 전문지식을 습득해 시장에서의 독점권이나 자율성, 높은 사회적 지위와 제도ㆍ정책 등에 대한 발언권과 같은 특권을 약속받는 대신 높은 도덕성과 경제적ㆍ지위적 보상 이상의 사회적 역할수행을 요구하는 일종의 사회적 계약관계로 풀이한다.
사회에서 대표적인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의사들도 일련의 관점에 기초해 일반적인 입장에서 찬성하고 동조할 수 있는 사안이라도 전문가의 입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나 문제를 지적하고 변화에 앞서 신중한 검토와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실제 더불어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지난 8월8일 발의한 일명 ‘데이트폭력방지법’에 대해 의협은 데이트폭력과 스토킹의 사회적 문제점과 법률안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행위에 대한 판별 기준이 불분명하고, 신고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상처가 데이트폭력의 결과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도 없지만, 이를 강요하는 것은 의사의 전문성이나 권한을 넘어서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며 오인이나 오판에 따른 피해나 부담을 고려하지 않은 법안이라는 설명이다.
지난 9월6일과 8일 김명연 의원과 인재근 의원이 연이어 발의한 한의사의 진단용 방사선발생장치 사용 허가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서도 의협은 같은 차원에서 반대 입장을 밝혔다.
일견 X-ray나 CT와 같은 의료기기를 누가 사용하든 진단과 치료가 제대로 이뤄진다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가에서 자격을 부여한 의사와 한의사의 전문성은 엄격히 구분돼야하며 신체와 질병을 접근하는 기본적인 방식과 시각, 지식수준에서 차이가 있어 이를 무시한 법안을 인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변화 직면한 전문가주의… 의사만 고민해선 안된다
14일 김승희 의원이 결핵검진 의무실시기관과 시기를 명시한 결핵예방법 개정안, 정부의 결핵관리종합계획, 감염병 예방ㆍ관리법 개정에 반대의사를 표한 것 또한 의료전문가주의의 발로로 풀이된다.
결핵예방법 개정이나 제2기 결핵관리종합계획,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대해서도 의료기관 등의 집단시설에서의 결핵 및 잠복결핵검진의 의무화나 결핵관리 간호사의 처우개선, 다제내성 결핵관리 강화 등은 국민의 건강을 수호하는 국가의 책무라는 지적이다.
실제 의협은 2기 종합계획에 대해 “보다 전략적 구상이 있어야 함에도 1기 사업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며, 의료인 등에 대한 의무를 부과할 경우 최소한의 지원은 반드시 이뤄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결핵 및 호흡기학회와 대한병원협회 또한 제도 보완과 의료진에 대한 교육 강화, 전문가의 협조에 의한 제도적ㆍ정책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하기도 했다. 전문가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아닌 협조를 구하는 협력관계여야 한다고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과 시각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전문가로서 가진 자긍심과 전문성에 대한 확신, 주어진 권한과 책임에 대한 인식을 무시할 수도 없다. 문제는 사회가 발전하고 의사를 비롯한 전문가에 대한 대중의 신뢰와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직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는 등한시한 채 주어진 특권은 스스로의 이익 추구에 적극 활용한다는 비난과 함께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정보의 불균형과 지식의 격차가 줄어들며 전문가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다.
이에 미국과 영국은 2000년을 전후해 의료전문가주의를 의사나 현대의료의 특징이 아닌 도덕적 요소를 중심으로 재정립하고, 변화된 조건과 환경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 자율성과 자율규제, 특권 등은 약화시키거나 폐기하고 더 높은 책무성과 지식, 기술의 우수성을 강조했다.
환자와 의사관계를 넘어 보건의료자원의 할당에서 의사가 차지하는 관리책임과 사회복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의식을 강화하며 진료에 대한 내부감독 강화와 합리적 외부 관리규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같은 측면에서 아직 초기 구조기능주의적 견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국내 의료계의 의료전문가주의는 달라져야할 것이다. 특권의식과 자율성을 주장하기에 앞서 환자와 보건의료체계에 대한 이해와 헌신에 힘써야한다. 반대로 사회와 대중 또한 의료전문가주의, 더 나아가 전문가에 대한 정의와 역할에 대해 다시금 논의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전문가는 분명 특정 분야에 대해 높은 지적 수준을 갖추고 보다 폭넓고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판단이 가능한 집단이다. 그렇다고 전문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특권층은 아니다. 사회가 세분화되고 고도화됨에 따라 사회를 구성하는 모두가 전문가이며 함께 사회를 발전시켜가는 구성원이라는 인식이 바탕이 돼야할 것이다. 보다 안전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위해서.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