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한상진답지 않은 행보다. 미니시리즈 대신 일일드라마에 출연한 것도, 두 번 연속 강한 악역을 맡은 것도 분명 이전과 다른 모습이다. 무엇이 그를 바꾼 것일까.
지난 24일 선릉로 한 식당에서 만난 한상진은 보통 인터뷰보다 긴 시간을 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털어놨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집요하게 연기와 배우로서의 생활에 대해 들려줬다.
한상진은 최근 종영한 KBS2 ‘인형의 집’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인형의 집’은 13~15%대 시청률을 꾸준히 기록하며 일일드라마로선 많은 사랑을 받았다. 총격 장면이나 그가 짜장면을 뒤집어쓰는 장면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한상진은 “일일드라마는 처음이었다”며 출연 계기를 전했다.
“신인 때는 연속극을 하던 배우들이 자리를 잡으면 안 해요. 저도 어느 순간 보니까 계속 미니시리즈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가 저희 어머님이 제가 나오는 드라마를 안본 지 오래됐다고 하시더라고요.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다니시는데 오후 8~9시면 주무시거든요. 아들이 TV에 매일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셔서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하다가 ‘인형의 집’을 만났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인 악역이라는 점이 끌렸죠. 막상 일일드라마를 해보니까 연기 잘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5개월 동안 매주 150분 분량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매일 책임감을 갖고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니까 보통 연기 내공이 아니면 견딜 수 없겠다 싶었죠. 같이 하는 배우들을 존경하게 됐어요. 덕분에 저도 초심을 찾게 됐고요.”
한상진은 tvN ‘써클’과 ‘인형의 집’에서 연속으로 악역을 맡았다. ‘써클’에서 맡은 박동건은 점점 악하게 변하는 인물이었고 분량도 12회로 짧았다. 하지만 ‘인형의 집’은 처음 등장부터 마지막회까지 나쁜 사람이었다. 분량도 100회가 넘었다. 한상진은 매일 나쁜 인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놧다.
“악역을 이렇게 길게 해본 적이 없어요. 지난해 감독님을 처음 만난 이후부터 7개월 동안 나쁜 사람으로 산 것 같아요. 매회 뭔가를 집어던져야 하고, 매주 큰 싸움이 하나씩 있었죠. 긴 시간 동안 균형을 맞추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악역도 보통 1부터 시작해 10까지 악한 정도가 올라간다면 ‘인형의 집’의 장명환은 처음부터 10인 상태로 시작했거든요. 계속 그 이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갈수록 캐릭터가 지루해져서 저도 한계에 부딪힐 때쯤 짜장면을 맞았어요. 잊을 만하면 따귀를 맞고 짜장면을 맞으니까 더 나빠질 수밖에 없었죠. 연기하면서 눈에 힘주지 말자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진짜 악인은 아무리 조급한 상황이어도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우아해 보이는 백조가 물 밑에서는 발을 바쁘게 움직이는 이미지를 정말 많이 떠올렸어요.”
한상진에게 ‘인형의 집’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늘 비슷한 작품에 비슷한 역할로 출연하던 관성을 깨려는 시도였다. 10년을 함께했던 소속사를 나와서 새로운 곳을 찾아간 것도 같은 이유였다. 배우로서 더 폭넓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전 소속사(블러썸엔터테인먼트)는 정말 편했어요. 10년을 함께한 만큼 모든 조건에 저에게 최적화돼 있었죠. 그러다보니 배우로서 조금 군살이 붙었다고 할까요. 어느 순간 제가 편한 작품만 하려고 하더라고요. 인간 한상진이면 계속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배우 한상진은 새로운 도전과 변화가 필요했어요. 더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거든요. 전 꽃미남도 아니고, 몸짱도 아니고, 잘생긴 배우도 아니에요. 그러다보니 착하고 정의로운 역할을 많이 했죠. 전 더 센 역할도 하고 싶은데, 지금까지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만 들어오는 게 싫고 답답했어요. ‘이런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작품이 ‘인형의 집’이에요.”
마지막으로 한상진은 배우로서의 자세를 강조했다.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드라마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후배들에 대한 칭찬도 하나하나 늘어놨다. 최근 제작사를 차리고 신인들에게 단역 연기 포인트를 알려주는 유튜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경력이 쌓인 만큼 후배들에게 조언도 할 정도가 됐지만, 매 작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 ‘인형의 집’을 시작할 때 아무리 봐도 제 얼굴이 나쁜 사람처럼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빨을 갈았어요. 옆모습을 봤을 때 이빨이 비어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배우가 더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만큼 망가지는 노력도 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제 연기 철학이에요. 한상진은 일일드라마를 왜 이렇게 열심히 하냐는 말도 들었어요.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에요. 대작 미니시리즈든, 일일드라마든 배우는 주어진 작품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작품이냐에 따라서 준비를 다르게 하는 건 나쁜 거죠. 대충해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프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