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진은 있어도 몰락은 없습니다”
지난 2016년 4월이었다. 길었던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나 기어코 그해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롤챔스) 스프링 시즌 우승을 차지한 김정균 SK텔레콤 T1 감독(당시 코치)은 우승 트로피 앞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은 곧 SKT를 대변하는 어구가 됐다. SKT 선수들은 트로피 수납장을 가득 채우면서 감독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소년 만화 주인공처럼 늘 고난 끝에 해피 엔딩을 맞이했다. 한 선수가 침체기에 빠지면 다른 선수가 두 배로 활약했다. 수세에 몰리면 대규모 교전에서 그림 같은 대승을 거둬 반전 드라마를 썼다. 세상은 SKT를 ‘명가’라고 불렀다.
2018년은 명가 자존심에 금이 간 해로 기억될 것이다. SKT는 지난 12일 서울 서초 넥슨 아레나에서 열린 2018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한국 지역 대표 선발전 1라운드 경기에서 젠지에 세트스코어 2-3으로 역전패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긴 오프 시즌을 맞게 됐다. 지난 2014년 이후 4년 만에 무관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어쩌면 예견됐던 일이었다. 올해의 SKT는 지난 2013년 팀 창단 이래로 가장 경쟁력이 부족했던 SKT였다. 수년간 최정상 자리를 지켰던 ‘페이커’ 이상혁과 ‘뱅’ 배준식, ‘울프’ 이재완이 흔들렸다. 선장의 판단력이 흐려지자 함선도 풍랑을 견디지 못했다. 5연패, 4연패 등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좌절을 맛봤다.
신인인 ‘트할’ 박권혁과 ‘블라썸’ 박범찬, ‘에포트’ 이상호는 선배들이 해왔던 역할을 대신하지 못했다. 이중 박권혁과 이상호는 사실상 주전으로 시즌을 치렀지만, 자리에 걸맞은 경기력이 나오지는 않았다. 박권혁은 상대 탑라이너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이상호는 판단 미스로 불 필요한 데스를 기록하는 일이 잦았다.
그들의 경력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성장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이다. 바꿔 말하면 더 성장해야 한다. 최고 명문 게임단의 주전 선수로 나서기엔 기량과 경험이 부족했다.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이다. 모든 유망주가 이상혁처럼 데뷔와 동시에 역사를 써내려갈 수는 없다.
선수 개인이 아닌 게임단의 오프 시즌 전략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였다. SKT는 지난 2017년 팀 주전으로 활약했던 ‘후니’ 허승훈, ‘피넛’ 한왕호와 작별했다. 두 선수는 유럽과 한국에서 실력을 입증한 이른바 ‘슈퍼스타’들이었다. SKT는 그들을 떠나보낸 뒤 다른 ‘슈퍼스타’를 모셔오지 못했다.
SKT는 오프 시즌과 스프링 시즌 동안 유망주 5인을 영입하는 데 그쳤다. 그 전 해에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남겼던 ‘운타라’ 박의진과 ‘블랭크’ 강선구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부여했다. 세계 최고 명문 게임단이라는 칭호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오프 시즌 행보였다.
분명 박권혁 등은 올 시즌 내내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SKT에는 그들보다 나은 기량을 보유한 선수가 없었다. 더블 스쿼드를 운영했지만 그 어느 팀보다 얇은 스쿼드였다. 이 점은 지난 12일 젠지와의 맞대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젠지는 ‘크라운’ 이민호, ‘하루’ 강민승을 교체 기용해 역전승을 거뒀다. 이민호는 올 시즌 3회 출전에 그쳤던 선수였다. 강민승은 최근 일주일 간 연습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준급의 기량을 보유한 이들이었다. 그날 SKT엔 그런 선수가 없었다.
SKT가 명성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빅 네임 영입이 필요하다. 타 종목의 명문 구단들에겐 늘 ‘스타군단’이라는 칭호가 따라다닌다. 레알 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의 공백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메웠다. 코비 브라이언트를 떠나보낸 LA 레이커스는 르브론 제임스를 영입했다. 지난겨울 SKT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쌀쌀한 오프 시즌을 맞이하게 됐다.
윤민섭 기자 yoonminseop@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