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종영한 JTBC ‘멜로가 체질’ 속 다큐멘터리 감독 이은정(전여빈)은 그 자체로 독특한 캐릭터다. 죽은 남자친구의 환영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성공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을 냉철하게 내려다보는 인물이다. 평범한 성격도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와 아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런 은정에게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은정을 소개한 배우 전여빈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드라마 종영 전 서울 학동로 한 카페에서 만난 전여빈은 마지막 촬영을 마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 ‘멜로가 체질’을 마쳤다는 실감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동료 배우들과 모바일 메시지를 나누며 자신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완성도에 매번 감탄한다. 전여빈은 대부분의 질문에 “감사하다”는 말로 답변을 시작했다. 이제 드라마 첫 주연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쳐서인지, 작품이 좋아서인지, 스스로의 만족도가 높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감사하다”는 말투와 표정, 태도에 진정성이 묻어나 그렇게 감사한 이유를 되묻지 못했다. 대신 ‘멜로가 체질’ 출연 계기와 이은정 캐릭터의 해석, 배우 활동을 준비한 시간들에 대해 물었다. 전여빈은 매 질문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다음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 ‘멜로가 체질’ 촬영을 마친 지 좀 됐는데 종영한다는 실감이 나시나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도 아직 드라마가 끝났다는 게 잘 실감이 안 나요. 9월 초에 마지막 촬영을 하고 종방연과 기자간담회를 하면서 식사와 회식도 했고요. 저희 단체방이 있는데, 곧잘 시끄러워져요. 서로 공유하는 것도 많고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보면서 이야기도 나누고요. 그래서 그런지 아직 끝났다는 기분이 안 드는 것 같아요. 마지막 방송 때 저희끼리 소규모로 모여서 식사하고 드라마를 보기로 했어요. 이야기를 실컷 나눈 다음에 헤어지는 길에 끝났다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어요.”(해당 인터뷰는 종영 전인 9월 25일 진행)
- 촬영을 모두 마치고 ‘멜로가 체질’을 보는 기분은 어땠나요.
“저도 보기 전엔 긴장되고 설레고 기대돼요. 제가 참여한 작품인데도 보고 나면 마음이 충만해지고 너무 재밌는 거예요. 신이 나서 감독님들에게 감사하다고 연락드리고 배우들 단체방에서 이야기를 나눠요. 작품을 글로 봤을 때 기쁨도 있지만, 배우의 연기와 편집, 음악이 입혀져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 또 다르게 보이고 새롭게 와닿는 것들이 많았어요. 동료 배우나 선배님들의 연기를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잘 살리셨는지 존경스러울 때도 있고요.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종류의 드라마였어요. 이 작품의 가치를 생각하면 촬영하면서도 자랑스럽게 느껴졌어요.”
- 은정 역할에 대해 촬영 전 감독님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전 사실 작품을 시작하면 감독님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에요. 글 속에 캐릭터가 다 그려져 있을 거라고 믿는 편이고, 제가 할 수 있는 해석을 해치기 싫은 면도 있어요. 감독님의 말을 들으면 제가 파고들어서 나올 수 있는 인물의 색깔을 잃고 인물만 생각하게 될 것 같고 획일적인 표현이 나올 것 같아서 처음엔 지양해요. 제 방식대로 인물을 먼저 만나고 현장에 가서 소통할 때는 유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은정이의 첫 장면은 효봉(윤지온)이 있는 플랜디 사무실에 도시락을 가져가는 굉장히 코믹한 장면이었어요. 감독님이 그 장면의 톤 앤 매너를 어떻게 잡으실지, 어떤 말을 해주실지 궁금했거든요. 감독님은 은정이가 효봉이를 보면서 짓는 미소의 최대한이 이 정도일 것 같다고 보여주셨어요. 그 표정에서 모든 답을 찾았어요. 은정 캐릭터에 대한 감이 온 거죠.”
- 전여빈 배우가 본 이은정의 색깔은 어떤 색이었나요.
“무채색 안에 무지개처럼 많은 색이 펼쳐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검정색 크레용을 긁으면 그 밑에 색이 드러나는 것 있잖아요. 은정이는 무지갯빛 위에 회색 크레용이 덮여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냥 아픔을 갖고 있을 뿐이지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때는 용기 있고, 어떤 때는 누구보다 약하기도 해요. 아픔을 감당하기 버겁고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다가 직시하게 됐을 때 다시 용기를 내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멜로가 체질’은 선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이상하게 너무 하고 싶었어요. 당시에 대본을 보자마자 ‘이걸 정말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인물들이 한명 한명 살아있는 게 매력적이었고, 현미경으로 창밖을 보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바깥소리가 들릴 것 같았고 같이 나도 광장에 뛰어들어서 떠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글을 쓴 사람이나 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들과 같이 힘내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이제 시작하는 신인 배우 입장에선 할 수만 있으면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었어요. 감사하게 그 기회가 제게 와준 거죠.”
- 처음에 4부 대본까지 봤으면, 은정이의 이후 이야기는 몰랐던 거예요?
“이 친구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몰랐어요. 대본을 읽을수록 은정이 캐릭터가 너무 좋았어요. 정말 이렇게 자신의 아픔을 발견하는 캐릭터가 없었잖아요. 전 극 자체의 희극성이 은정이의 비극과 잘 어우러져서 은정이 캐릭터가 드라마에서 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묘한 조화가 일렁이는 드라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뻔하지 않은 것 같아요.”
- 다큐멘터리 감독인 은정 캐릭터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감사하게도 제가 연기를 전공하면서 연출을 공부한 여성 감독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일하면서 여성 감독님과 친분이 생길 기회도 많았어요. 전 다큐멘터리 감독과 극 감독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뭔가를 말하고 싶고 세상을 담아내는 창작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은정이가 전형적인 감독은 아니에요. 이 친구는 말도 안 되는 대박을 터뜨려서 재력을 갖고 있으니까요. 옷을 화려하게 꾸미진 않지만 정돈되게 입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보통 생각하는 감독의 거친 외형을 갖고 있진 않을 것 같았어요.”
- 은정이의 과거 스토리가 다른 인물들만큼 자세하게 나오진 않은 것 같아요.
“가족에 대해 상담하는 장면에서 은정이의 이전 스토리가 나오는데 은정이가 결함이 있어서 하는 얘긴 아닌 것 같았어요. 사람마다 느끼는 결핍의 지점이 다르잖아요. 부유했던 사람이라도 외로운 마음이 있을 수 있고, 환경적으로 빈곤했던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결핍도 있을 거고요. 저는 은정이만의 결핍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과거보다는 홍대(한준우)의 부재에 제일 큰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 전여빈 배우가 연기를 처음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스무 살 때 전 잘하는 것도 없고 좌절감이 컸던 사람이었어요. 특기도 취미도 없었고요. 제가 유일하게 가장 가까이했던 게 영화를 보는 거였어요. 보다 보니까 이상하게 마음의 울림이 생기고 많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게 좋았던 것 같아요. 영화라는 매체가 나를 안아주는 것 같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어요.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 그 감정을 깨워주니까요. 내가 용기를 내서 살아있는 동안에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할 수 있다면 뭐가 하고 싶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어요. 가족들에게 용기를 내서 얘기했고, 가족들이 정말 고맙게 응원해줬어요. 대학교 시험을 봤고 수업을 들으면서 더 확신이 생겼어요. 내가 이걸 많이 사랑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 데뷔까지 시간이 좀 걸렸잖아요.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제가 학교를 입학하고 느꼈던 건 긴 시간 노력한 사람이 많다는 점이었어요. 아역부터 배우 활동을 해온 친구도 있었고 예중·예고를 나온 친구도 있었죠. 그때 좋은 충격을 받았어요. 나의 연기와 영화라는 호기심이 불나방 같은 건 아닌가 싶어 부끄러워졌거든요. 그렇게 오래 준비한 친구들을 보면서 전 좀 더 진득하게 배우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반을 닦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방식대로 어떻게 하면 노력했다는 배우가 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죠. 다른 배우들도 다 하는 노력이지만, 대학로에서 선배님들의 공연을 보면서 막내 스태프부터 시작했어요. 독립영화를 만들거나 스태프 일은 오랫동안 했고요. 기술적인 면도 공부가 많이 필요하니까요. 대학교에서 좋았던 건 미학과나 모델과, 무용과, 실용음악과, 회화과 등 타과 전공 수업을 듣는 거였어요.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것들에 관심을 갖고 있고 어떻게 자신의 것들을 파고 있는지 궁금했거든요. 비싼 등록금을 내고 강릉에서 나름대로 유학을 온 저한테 소중한 그 시간을 잘 쓰고 싶었어요.”
- 지금 시점에 전여빈에게 배우라는 직업과 연기는 어떤 의미인가요.
“많이 고민하고 담아놨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작업하면서 느끼는 건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너무 좋아하는데 제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연기가 재밌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들어요. 당장 단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 마음을 더 알아가 보자고 생각해요. 이 마음의 원인이 뭐고 내가 왜 이걸 좋아할까, 왜 행복할까를 생각하죠. 연기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커서 마음의 균형을 찾으려고 해요. 가끔은 이렇게 좋아하면 안 되나 싶기도 하지만 제가 연약해지거나 부러지고 엎어질 것 같아서요. 생각해보면 저한테 배우와 연기가 은정의 홍대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 ‘멜로가 체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은정이가 친구들에게 ‘힘들어, 안아줘’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진주(천우희)와 한주(한지은)와 효봉이가 안아주는데 너무 따뜻했어요. 실제로도 진짜 포근하더라구요. 그 장면을 찍고 나서도 여운이 가시질 않아서 언니들이 좀 더 울었던 것 같아요. 전 오히려 그들이 안아주니까 여기까지 차 있던 울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어요. 촬영이 끝난 다음에 감독님도 안아주자 해서 촬영감독님도 FD 친구도 같이 안아줬던 기억이 나요.”
- ‘멜로가 체질’을 보내며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작품이 배우에게 올 수 있는 운명이나 인연이 있는 것 같아요. 저의 서른 살, 이 시기에 은정이를 만나고 또래 배우들을 만나서 신나게 떠들었던 기억이 앞으로도 저에게 좋은 자양분이 될 것 같아요. 오랫동안 걸을 배우의 길에 서로 응원해줄 수 있는 조력자를 만난 것 같거든요. 출발부터 기운이 정말 좋아요. 이 행복한 기운을 갖고 앞으로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서 걸어보려고요. 다시 돌아가서 이 시기에 뭘 선택하겠냐고 묻더라도 전 ‘멜로가 체질’을 선택해서 은정이를 만날 것 같아요.”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