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세계’ 지선우의 다시 쓰는 신화 [TV봤더니]

‘부부의 세계’ 지선우의 다시 쓰는 신화 [TV봤더니]

‘부부의 세계’ 지선우의 다시 쓰는 신화

기사승인 2020-04-24 07:00:00


[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JTBC ‘부부의 세계’ 속 지선우(김희애)를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머리카락 한 올에서 시작된 작은 의심은 그가 살아온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사랑하는 남편은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얼빠진 말로 불륜을 긍정하고, 그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은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라며 아빠의 불륜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취급한다. 믿었던 직장 동료는 남편과 자신을 오가는 ‘이중간첩’이었고, 절친한 이웃사촌 역시 남편의 외도를 모른 척 했다. 평범한 사람이 온전한 정신으로 견디기 힘들 독한 악재가 한 번에 지선우에게 쏟아졌다.

이같은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는 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현실적인 건 진흙탕 속에서도 자신의 품위를 지켜내는 지선우다. 지선우는 짐승들이 사는 세계에서 짐승이 되지 않지 위해 애쓰는 유일한 인간처럼 움직인다. 눈물을 흘리고 술을 마시며 감정을 가다듬은 후 치밀하게 복수를 설계하고 냉정하게 실행한다. 상대방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지선우가 던지는 말들은 더 의미심장하다. 자신이 느낀 분노를 하나하나 설명하거나 저주를 쏟아내는 대신, 상대의 잘못을 정확하게 지적하고(“다른 계집애랑 재미 볼 땐 자식 못보고 살 각오 정돈 했어야지”) 지금의 복수가 정당한 이유(“친구라고 생각했던 너마저 날 속였다는 게 못 견디게 슬펐으니까”)를 말해준다. 이는 복수 자체를 욕망하지 않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이다. 그 장면들에서 지선우는 일종의 심판관을 넘어 진실을 일깨우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신화 속 구원자처럼 보인다.

‘부부의 세계’의 원작을 따라가면 그리스 신화가 나온다. ‘부부의 세계’ 원작인 BBC ‘닥터 포스터’는 그리스 극작가 에우리피데스가 기원전 431년 쓴 비극 ‘메데이아’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메데이아’는 아내인 메데이아가 자신을 버린 이아손에게 복수하는 내용의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랑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배신하고 동생을 죽이기까지 한 격정적인 여인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은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크레온의 딸 글라우케 공주와 결혼하려는 이아손의 배신에 분노한 메데이아가 글라우케와 자신의 아들들까지 모두 죽이는 참혹한 복수의 이야기다.

그리스 신화에서 질투에 눈이 먼 마녀로 그려지는 메데이아의 이미지를 2015년 제작된 ‘닥터 포스터’가 뒤집었다. 21세기 젠더 개념에 맞게 ‘닥터 포스터’는 남편의 배신에 화가 난 젬마 포스터(슈란느 존스)의 복수를 주체적으로 그렸다. 자신의 힘으로 성공의 반열에 오른 남편의 불륜이나 복수가 자식에게까지 연결되는 점 등 핵심 서사를 그리스 신화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작가 마이크 바틀렛(Mike Bartlett)은 영국 매체 라디오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젬마를 미쳤다고 묘사할 때 화가 난다. 그녀는 단지 매우 화가 났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젬마가 남자였다면 미쳤다고 말하지 않고 반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영국 원작 드라마를 5년 만에 리메이크한 한국의 ‘부부의 세계’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주인공의 관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원작보다 주변 인물들의 관계까지 다루며 세계를 확장한 것. 확장된 이야기의 성격에 맞게 제목도 인물(‘닥터 포스터’)에서 세계(‘부부의 세계’)로 바뀌었다. ‘부부의 세계’ 제작발표회에서 모완일 PD는 “주인공 캐릭터의 대단함도 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휘몰아치는 느낌이 좋아서 한 인물이 아닌 관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리스의 메데이아는 2500년의 시간을 건너 영국의 포스터가 됐고, 다시 한국의 지선우가 됐다. 많은 시청자들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참고 TV 앞에 앉아 ‘부부의 세계’를 보는 이유 중엔 수십 년 전만 해도 마녀라고 불렸을 여성의 단독 서사를 지켜보는 의미가 섞여 있을 것이다. 원작 시즌1 분량을 6회 만에 끝낸 지금의 속도라면 ‘부부의 세계’는 원작과 다른 결말, 혹은 그 이후의 이야기로 나아갈지 모른다. 역사를 넘어 신화를 다시 쓰는 지선우의 활약이 더 기대되는 이유다.

bluebell@kukinews.com

이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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