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볼거리가 풍성,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역사도시
-이팝꽃 떨어져 파란호수 하얗게 물들이고
-조선 최고의 누각 영남루에 앉아
-초여름 더위 식히며 볼거리 풍성한 트윈터널
-약산 김원봉 따라 항일 독립운동 산책
[쿠키뉴스] 밀양· 곽경근 대기자 =모처럼 서울 도심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수도권은 아직 연초록 빛깔이 남아있는 늦봄인데 한참이나 달려 목적지 밀양에 다다르니 신록이 더욱 진해졌다. 산 아래 아카시아는 흐드러지게 피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위양지 이팝나무 꽃들은 만개를 지나면서 파란 호수를 하얗게 물들였다. 수확을 앞든 남녘의 보리밭은 출렁이는 노란 물결로 장관이다.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점차 완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에 이어 생활 속 거리두기로 조심스럽게 바뀌어 가고 있지만 여기저기서 확진자 발생 소식이 이어지면서 아직도 나들이 짐을 꾸리기가 찜찜하다.
그래도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바람도 쐬고 자녀들 교육에도 도움이 될 만한 안전한 여행지는 어디 없을까?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를 비롯해 위양지, 트윈터널,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 등 쉼과 볼거리와 교육의 3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역사 도시 밀양을 찾아보면 어떨까, 긴 ‘코로나19’에 지친 나들이객들이 주말이면 유명 관광지 중심으로 모여들지만 밀양 지역은 아직 한가한 분위기이다.
그래도 영남루를 비롯해 사람들이 즐겨 찾는 밀양의 명소는 소독제 비치는 물론 일방통행, 열 체크를 해야 입장이 가능하다.
밀양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된 위양지의 색다른 추억 '위양지'
- 위양지에 투영된 완재정과 산 그림자는 한 폭의 산수화
-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드는 유명 장소로 떠올라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에서 만나는 밀양은 답답하다. 환하고 밝은 햇볕은 인간 내면을 감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르는 위양못에서 만난 밀양은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계절마다 달라지는 색다른 풍광 덕에 많은 관광객과 사진동호인들이 찾는 부북면의 위양지(못)는 밀양만의 역사와 문화가 잘 보존돼 색다른 추억을 선사하고 있다.
경남 밀양의 5월은 이제 막 여름으로 달려가고 있다. 찬바람이 가시기 전 매화 향기와 함께 시작한 봄 소식이 4월의 어느날 후다닥 피어 봄바람에 한순간 떨어져버린 벚꽃 화려함이 지난 자리에 이팝나무가 소복히 피었다 지면서 하얀 눈꽃을 날리고 있다.
위양지는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있다. 위양이란 양민(良民) 즉 백성을 위한다는 뜻이다.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 사이에 축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무너진 것을 인조 12년인 1634년 밀양부사 이유달(李惟達)이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위양못 제방길에는 왕버들, 수양버들, 이팝나무, 소나무, 팽나무 등과 같은 오래된 나무들이 둘러서 있다.
밀양의 진산인 화악산과 화악산 아래 아름다운 들판 위에 자리한 아담한 위양지 호수 주위에는 수백 년이 된 이팝나무들이 물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무엇이 실경이고 무엇이 반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자연의 데칼코마니를 연출한다.
시원한 조망 펼치는 웅장한 '영남루'
-누각 마루에 앉아 밀양강 경관 감상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 날 좀 보소 / 동지섣달 꽃 본 듯이 / 날 좀 보소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 님이 / 오시는데 / 인사를 못 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 입만 방긋 /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밀양아리랑’은 다른 아리랑보다 매우 빠르고 흥겹다. 때문에 아랑의 전설에서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너른 들녘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르던 농요라는 의견도 있다. 산과 강, 들이 모두 있는 밀양은 예부터 곡식과 과일 농사가 많은 풍요로운 고장이다. 연중 따뜻한 날씨에 수확하는 기쁨도 컸다. 하지만 들이 넓으니 농사는 고달팠고, 그것을 밀양아리랑이 달래줬다는 이야기다.
밀양아리랑은 광복군의 군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하던 밀양 사람들의 아리랑에 가사만 바꿔 부른 ‘광복군아리랑’이다. 밀양에서 사라져가는 밀양아리랑의 원형이 연변에 남아있는 이유다. 세월이 흐르며 다양하게 변형된 밀양아리랑은 100여 수가 전한다. 이중 광복군아리랑을 비롯한 몇몇 아리랑은 밀양시립박물관 아리랑 코너에서 만날 수 있다.
밀양강은 밀양 시내를 구획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삼문동의 남쪽 가곡동에는 밀양의 현대가 표출되고 있다. 20세기 초 경부선 밀양역이 들어서면서 공장과 주택이 크게 증가했다. 반면 북쪽 내일동은 밀양의 근세와 전근대를 상징한다.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함께‘3대 누각’으로 꼽히는 영남루(嶺南樓, 보물147호)가 있다.
밀양강변에 자리한 영남루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의 객사 부속 건물로 손님을 접대하거나 주변 경치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고려시대 처음 건설됐으나, 화재로 소실됐다가 19세기 중반에 중건됐다.
밀양강을 굽어보는 넓은 절벽 위에 남향으로 우뚝 선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 간격도 넓고 중층(重層)으로 돼 있어 우리나라 전통 건물 가운데 두드러지게 크고 웅장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서편의 침류당(枕流堂)과 동편의 능파당(凌波堂) 등 층계로 연결한 부속 건물이 딸려 있어 더욱 장중하게 느껴진다. 내부는 문인들이 쓴 작품으로 장식돼 있으며, 누각에 발을 딛고 내려다보는 조망이 시원스럽다. 강물에 비친 영남루 야경은 밀양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신비로운 빛의 세계에 빠지다 '트윈터널'
- 백년 된 폐터널 속으로 환상체험
삼랑진 밀양강변에 위치한 트윈터널은 신비로운 빛의 세계를 즐길 수 있는 이색 명소다. 특별한 볼거리와 체험 거리가 다양해 가족 여행지로 인기가 높고,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도 많아 커플들도 즐겨 찾는다.
트윈터널은 옛 경부선이 이어진 무월산터널을 활용한 테마파크다. 기차가 바쁘게 오갔을 터널은 시대가 변해 지난 2004년 KTX가 개통되고 철길이 끊기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차가 드나들던 어두컴컴한 터널이 2017년, 반짝이는 빛의 터널로 거듭났다. 상행 457m, 하행 443m 터널을 이은 형태도 독특하다. 두 터널의 쌍둥이 같은 모습에 트윈터널이란 이름을 붙었다. 트윈터널은 인근 만어사의 전설과 세간에 떠도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빛의 파노라마 세계다.
폐터널은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피서지로,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놀이 쉼터로 안성맞춤이다.
탄광 입구 같기도 한 터널 밖과는 달리 마치 블랙홀로 빠져들 것 같은 폐 터널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시원함과 함께 나도 모르게‘와’하며 입이 벌어진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벽면과 천장을 가득 메운 형형색색의 led 전구들이 밤하늘을 수놓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마치 별빛이 흐르는 은하수를 건너는 기분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성을 지르며 빛의 황홀경에 빠져든다. 어둠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며 행성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크고 작은 원형 볼들을 바라보면 마치 우주선 밖을 내다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포토 존이다.
볼거리는 이어진다. 바닷 속처럼 꾸민 테마 존에는 작은 수족관이 늘어서, 영롱한 불빛 아래 물고기들이 유영한다. 가족과 연인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적은 하트 쪽지가 빼곡한 곳도 보인다. 유령의 성 앞에서 사진을 찍고, 황금빛으로 물든 들녘을 신나게 걷다 보면 어느새 출구에 도착한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와 밀양 의열기념관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오’
- 보고 느끼는 독립운동 역사기행
해천은 의열기념관 앞을 흐르는 시내로, 조선 시대 밀양읍성을 따라 조성한 방어용 해자다. 근대 이후 읍성과 함께 사라진 해천은 몇 년 전 복원돼 시민의 산책로 겸 휴식 공간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항일운동 벽화를 더해 의열기념관 일대를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로 꾸며졌다.
밀양의 만세 운동 벽화로 시작하는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는 태극기의 종류와 변천사를 거쳐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으로 이어진다. 조선의용대는 김원봉과 윤세주가 주축이 되어 만든 독립운동 단체다.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 중심이던 의열단 투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맞설 무장 부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고, 조선의용대장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됐다.
일제강점기 내내 해외에서 항일 독립 투쟁에 앞장선 약산은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다시 고용한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고, 뜻을 함께한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는 등 남한에서 활동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마지막으로 분단을 막기 위해 김구와 같이 삼팔선을 넘어가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김원봉은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했으나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해천항일운동테마거리에 빼곡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훈장이나 표창이 없는 이는 약산 김원봉이 유일하다.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 유공자 서훈조차 하지 않은 탓이다. 약산은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독립운동가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왕고섶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