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천분의 1mm도 오차 없이 정확하게
- 정밀가공 50년 한 우물
- 몸에 밴 성실, 근면, 겸손
- 절실함이 가장 큰 성공요인
- ‘역경을 딛고 웃을 수 있기까지’ 자서전 펴내
[쿠키뉴스] 곽경근 대기자 =문래동 철공단지 너머로 초여름의 긴 하루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귓가를 울렸던 기계음과 용접 불꽃, 코끝을 맴돌았던 기름냄새, 쇳냄새도 투박한 철공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루 일과를 마친 크고 작은 공장의 직원들과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미식가들이 의외로 맛집이 많은 철강 골목 곳곳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즐기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방적 기계인 ‘물레’에서 유래한 문래동은 영등포의 빌딩과 아파트 숲 가운데 외딴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문래동 철강단지는 7~80년대 철강산업 발전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지만 외환위기와 철강 공장들이 수도권으로 이전하면서 지금은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원자재 판매부터 첨단 가공까지 이루어지는 철강단지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미사일도 조립할 수 있다”며 최고의 기술력과 함께 자긍심을 가지고 땀 흘리며 일하는 산업 현장이다.
지난 5일 늦은 저녁, 단지 내 공장들이 대부분 셔터를 내리고 불 꺼진 좁은 골목 한켠에서 초로의 장인이 홀로 불을 밝히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50년 가까이 쇠붙이를 깎고 다듬어온 ‘부일정공’의 오기석(65)사장이다.
두 번째 방문이었지만 ‘△△정밀’ ‘○○철강’ ‘프레스 금형’ ‘강판’ ‘특수용접’ 등 골목마다 비슷비슷한 이름이 즐비해 한참을 헤매다 겨우 오 사장의 공장을 찾았다.
빠끔히 열린 문틈 사이로 머리카락 천분의 일 굵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성형연마 전문가는 머시닝센터에서 나온 제품을 다시 한번 정밀하게 다듬고 있다. 완성된 공작물은 고난이도 제품도 완벽하게 측정할 수 있는 ‘3차원 측정기’를 비롯해 하이트게이지, 마이크로메타 다이알게이지, 블록게이지 등 다양한 측정 기구를 통해 완성품의 수치를 측정하는 장인의 눈빛이 매섭다.
머시닝센터(MC) 가공, 연마, 자동차 단조 금형이 전문인 ‘부일정공’은 문래동 철공단지의 미로 속 골목에서 1987년 창업해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일정공은 직원이라고 해야 10년 전 입사한 둘째 아들 원택(35)씨와 아들의 친구 그렇게 단출하게 세 사람이다.
하지만 성형연마 분야에서는 오 사장은 최고의 전문가로 통한다. 오 사장은 성형연마 중에서도 남들이 하기 어려운 고난이도의 초정밀 가공작업을 불량률 제로로 소화해낸다. 그만큼 일감도 끊이지 않아 오늘까지 그에게 ‘불황’이란 단어는 없다.
“먹고 살기 위해 배운 기술이 천직이 돼 버렸다”는 그는 “자신의 성공 비결은 절박함과 긍정적인 마인드”라고 밝히면서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절박함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남들처럼 내세울 만한 학력도 인맥도 없다. 오직 기술을 제대로 익혀야 인정받고 월급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벼랑 끝에 매달린 절실한 심정이 성공의 원동력이 됐다”고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기석 대표의 삶-
1955년생인 오 대표는 경상북도 문경군 점촌읍 신기리에서 농부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문경시멘트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만큼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성실한 부모덕에 초등학교 시절은 형제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 입학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부정입학에 연루되면서 사춘기 내내 방황의 시기를 거쳤다. 기술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오 대표는 1971년 서울로 올라와 왕십리에 위치한 상진정공에서 시다(견습공)로 첫 공장생활을 시작했다. 동료들과 단칸방에서 밥을 해 먹으며 휴일도 없이 기술을 익혔지만 쇳가루와 돌가루가 가득한 열악한 공장 환경에 폐결핵이 걸려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오 대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이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치료를 마치고 1973년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술자의 길에 재도전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손재주와 눈썰미, 끈기를 모두 갖춘 오 사장은 상진정공과 오리엔트시계, 정품물산, 동방금형 등에서 밤을 낮 삼아 노력한 끝에 모두가 인정하는 기술자가 됐다.
군대를 마치고 다시 입사한 상진정공에서 명문학교를 나온 동료들을 제치고 최고의 기술자 대우를 받으며 10년간 근무했다. 1987년 문래동에서 부일정공을 창업했다. 이후 원자력연구소와 전매청, 대원강업 등과 일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회사를 키웠다.
사실 하루 종일 분진을 마실 수밖에 없는 성형연마 분야는 오 대표에게 적합한 기술이 아니었다. 폐결핵과 함께 어려서부터 축농증을 앓아 입으로 숨을 쉬는 그에게는 절대 불리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선반, 밀링, 판금 등 다양한 기술을 접해본 오 대표는 남보다 뛰어나게 잘할 수 있고 노력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기술이다.
지금은 공장에 분진을 흡입하는 집진기 설치가 되어있지만 그래도 미세먼지를 마실 수밖에 없는 업종이다. 직장 생활 당시 신체검사를 하면 늘 폐결핵환자로 분류되었다. 아이들이 한창 클 무렵에는 본인 건강보다도 혹이라도 가족에게 병을 옮길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왔다. 밥 때를 놓쳐 독한 결핵약에다가 위장약까지 한움큼씩 약으로 배를 채운 시절도 있었다.
지금처럼 3D 성형연마기 없던 시절에는 특별한 손재주 외 삼각함수 등 수학적 두뇌회전이 없으면 큰 업체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난이도 제품을 생산할 수가 없었다. 특히 회사가 한창 커나갈 무렵, 전매청에서 요구한 담배 말이 성형 제품은 오 대표가 제작에 성공하지 못했으면 외국에서 만들어 올 뻔 했단다. 오 대표는 전매청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덕분에 원청회사인 승리특수기계와 함께 전매청 산하의 담배공장 일을 도맡아 했다. 당시는 한 달 번 돈으로 집 한 채를 살 정도로 지방에 납품하면 헌 승용차 트렁크에 현금을 가득 싣고 상경했다고 회상한다.
“젊은 시절, 명절에 남들은 다 선물보따리 들고 고향 내려가도 돈도 아끼고 남들 쉴 때 한 가지라도 기술도 더 익히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며 “좌절과 힘든 시기도 많았다. 담배도 술도 안 했다. 늘 성공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음 판에 새기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 날 성공이 찾아 오더라”며 오 사장은 환하게 웃었다.
오 사장의 첫 직장동료인 강종식 사장(65· 금속판매업)은 “오 대표은 누구보다 서울와서 뼈저리게 가난의 고통을 체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열심히 일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실패한 동료들을 조용히 도와주는 모습을 많이 봤다”며 “50년 지기 친구지만 진심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오 사장에게는 마지막 소박한 꿈이 있다. 평생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납품했지만 자체 브랜드 제품은 아직 없다. 50년 기술을 집약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실용적 제품, 후대까지 물려 줄 수 있는 명품을 한 가지 만들고 싶다. 구상이 거의 끝났지만 아직 공개할 단계는 아니란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제품이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평생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내와 가족을 위해 서울 근교에 아담한 집 한 채 짓고 텃밭도 가꾸며 충분한 시간을 보내려 한다.
-‘역경을 딛고 웃을 수 있기까지’-
그는 몇 달 전 자서전을 펴냈다. 과연 자신이 자서전을 써도 될 만한 사람인가도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이쯤에서 자신의 삶을 한번쯤 정리하고 되돌아보고 싶었다. 매일 7시에 출근해 바쁠 때면 식사도 거르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휴일도 없었다. 정말 두 아들과 아내가 필요한 시간에 함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크다.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만큼 자신의 아이들만큼은 넉넉한 환경에서 키우고 싶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부도 쌓았고 국가산업발전에도 기여했다. 자신이 국산화에 성공해 비싼 로열티를 외국에 지불하지 않은 제품들도 있다. 비록 양산화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우유병 특허권을 비싼 값에 사가겠다는 일본 바이어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도 했다.
오 사장 아내 이선자(61) 씨는 “남편이 자서전을 쓴지도 몰랐다. 어느 날 책을 포장해 선물이라며 내 놓을 때 깜작 놀랐다. 사실 책을 읽으며 자꾸 눈물이 나서 여러 번 책을 덮었다”면서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다. 남편이지만 정말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럽다. 더 잘해 주어야겠다”고 말했다.
큰 아들 오호택(37) 씨도 “아버지의 자서전을 읽고 한참이나 가슴이 먹먹했다. 졸업식 때조차도 아빠가 안오셔서 서운했었는데 이렇게까지 가정을 지키려고 혼신을 다한 모습을 보면서 아버님처럼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서전 말미에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게 삶이다. 핑계를 대다보면 끝이 없다. 환경은 이겨낸 자만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그 삶이 자랑스럽다”고 정리했다.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