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민수미 기자 = 16일. 미국 폭스뉴스의 설립자 로저 에일스가 가장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2016년 여름 폭스뉴스에서 해고된 그레천 칼슨이 로저 에일스에게 성희롱 혐의로 소송을 걸며 시작된 이 사건은 1년 후 영화계의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을 향한 미투 폭로의 전조였다. 배우 샤를리즈 테론이 제작자로 나섰고, 영화 ‘트럼보’의 제이 로치 감독이 연출에 합류했다. 북미에서 지난해 12월 개봉한 ‘밤쉘’은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라는 친절한 부제를 달고 지난 8일 한국에 도착했다. 쿠키뉴스 대중문화팀 이준범 기자와 특별취재팀 민수미 기자가 각자의 시선에서 본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을 정리했다.
■ ‘밤쉘’을 본 감상
- 이준범 기자 : 영화적 즐거움 이상의 의미에 눈길이 갔다. 성폭력 고발 실화를 다룬 기존 영화들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들춰내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고난기에 초점을 맞췄다. ‘밤쉘’은 권력형 성폭력이 은폐, 재생산되는 구조 내부를 다루는 과감한 접근을 보여준다. 지나간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 이야기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밤쉘’이 잠재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밤쉘’을 제작하고, ‘밤쉘’을 보고, ‘밤쉘’을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의 움직임, 하나의 목소리이지 않을까.
- 민수미 기자 :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여성 앞에는 무수히 많은 허들이 있다. 뛰어난 업무 능력, 성실한 근무 태도, 조직원을 아우르는 리더 자질. 기본적인 시험에 통과하면 또 다른 질문의 문이 열린다. 성별에서 기인한 간극. 초과근무는 물론 자기 개발을 더해도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은 어떻게 메워야 하는가. 권력을 쥔 남성처럼 술을 잘 마시고 모여 담배를 피워야지만, 원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가며 내달려도 결국엔 권력형 성폭력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걸까. 아니, 바꿔 말해 결승선까지 도달하는 동안 성희롱과 성추행을 피한 운 좋은 레이서는 얼마나 되겠는가. 밤쉘을 본 많은 한국 직장 여성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군’
■ 인상 깊은 장면, 혹은 명대사와 그 이유
- 이준범 기자 :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가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에게 성희롱당한 과거를 팀원들에게 알리지 않는 장면.
메긴 켈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 끊임없이 손익을 계산하는 인물이다.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트럼프와 TV토론 설전으로 1년 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보다 잘 안다. 켈리가 그레천(니콜 키드먼)의 폭로에 심적으론 동조하지만 쉽게 손을 내밀지 않는 모습은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었고 그래서 현실적이었다.
- 민수미 기자 :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지. 누군가는 분노해야 하는 거야”
‘침묵은 금’이라 배운 자들에게 세상을 향해 선언하라니. 그것도 내가 당한 직장 내 성폭력을. 수치심은 차치하더라도 이불 속에서 혼자 했던 당치도 않는 자기검열을 대중에게 받아야 하는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황을 끝낼 수 있다. 제 2의 피해자를 막는다는 거창한 의미까지 갈 필요도 없다. 나는(그 어떤 여성도) 성폭력을 당할 이유가 없다.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 하더라도 성을 매개로 육체적·정신적 손상과 압박을 주는 것은 모두 성폭력이다. 성폭력은 범죄이고, 범죄자는 응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아니면 가장 공감되는 인물과 그 이유
- 이준범 기자 : 로저 에일스가 그레천에게 고발당한 후 아내, 변호사 앞에서 항변하는 태도는 영원히 물음표로 남을 것 같다. 그 장면부터 영화를 본다면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그는 태연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한다. 에일스가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한 것인지, 아니면 완벽한 연기를 하는지는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인물이다. 동시에 성폭력 범죄와 싸우려면 가장 이해해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민수미 기자 : ‘뭐야, 저거’ 밤쉘을 보다 속으로 외쳤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한 장면이었다. 영화관 뒷좌석에서 나지막이 ‘헐’이란 소리가 들렸던 걸 보면 다른 관객 역시 황당함에 동의한 듯했다. 비판 후에 생각했다. 나는 다른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물론 과거의 나라도 가해자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나눠 입자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상에 가린 부당이 걷히는 시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부단히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피해자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익숙지 않다면 통째로 외우기라도 해야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아주 오래전 남자 주인공이 여자에게 “끼 부리지 마. 나랑 잘 거 아니면”이라 말하는 드라마에 열광했었다.
■ 폭스뉴스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려면, 앞으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떤 제도나 정책이 필요할까
- 이준범 기자 : 근본적인 문제는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힘이 집중돼 있는 구조에 있다. 권력을 분산하거나 견제할 제도를 만들지 못하면, 권력형 범죄는 어느 집단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범죄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수십 년간 은폐, 반복되어 온 건 성과 중심주의를 지나치게 맹신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방치한 루퍼트 머독에게도 책임이 있다. 외부인도 납득할 투명한 인사 시스템 구축이 첫 번째, 직원의 내부 고발을 소화할 수 있는 건강한 시스템 구축이 두 번째로 필요하다.
- 민수미 기자 : 제도와 정책의 기반은 이해와 공감이다. 쉬운 이야기다. 어떠한 제도가 마련되려면 다수의 합의가 필요하다. 사안에 대한 의사가 일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피해자를 보호할 제도를 만들려면 이들을 바라보는 다수의 시각이 같아야 한다. “퇴사하고 소송을 걸었어야지, 잘리니까 소송한 거잖아”, “왜 불평 안 했을까?” 힘든 소송을 시작한 그레천 칼슨에게 쏟아진 의심은 과연 소수 의견일까. 아니다. 우린 이 대답을 최근 서울시장의 사망을 통해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법적 장치는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피해자를 위한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 2020년 한국에서 ‘밤쉘’을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나
- 이준범 기자 : 권력형 성범죄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외적이고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밤쉘’은 용기 있는 폭로와 연대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를 한국에서 보는 건 그 이상의 의미다. 국내에서 화제가 된 권력형 성범죄들과 유사한 점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문화와 정서가 다른 한국과 미국에서 같은 방식의 권력형 성범죄가 동시에 발생하는 이유는 뭘까. 권력자들의 성범죄 문제를 풀어야 할 숙제로 떠안게 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고민이다.
- 민수미 기자 : 열이면 열, ‘밤쉘’을 보고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말한다. 당연하다. 직장 내 성추행이자 위계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 등 여러 상황이 영화와 같다. ‘밤쉘’이 남긴 의미와 2020년 7월 한국에 남은 숙제 역시 동일하다. 결국 성폭력, 피해자, 연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상식’에 대한 이야기다. 성추행은 면죄 받을 수 없는 범죄이며 이러한 사건에서 피해자 보호보다 중요한 건 없다는 상식.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는 언제쯤 올 것인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
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