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마블을 넘어설 슈퍼히어로 시리즈가 나올까.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개봉 1년 후인 2020년은 이 질문에 긍정하기 힘든 해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마블은 슈퍼히어로 장르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 원작 만화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스크린으로 되살렸고 그들이 뭉쳐 싸우는 장관을 탄생시켰다. 솔로 무비의 완성도도 높아져 슈퍼히어로 장르를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를 바꿨다. 그들이 느끼는 삶의 애환으로 시작해 선과 악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 옳은 일을 추구하는 방식의 변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슈퍼히어로 장르는 빠르게 성숙해졌고 놀랄 정도로 스케일을 키웠다. 이제 ‘어벤져스’ 시리즈의 개봉은 전 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하는 마블 스튜디오의 자축 파티에 가까워졌다. 어느새 마블은 하나의 장르가 됐다.
모든 슈퍼히어로 영화가 마블을 꼭 넘어서야 할 필요는 없다. 돌아가는 것도, 반대로 가는 것도 방법이다. 넷플릭스가 론칭한 새 슈퍼히어로 시리즈 영화 ‘올드 가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뿌리는 비슷하지만, 다른 방향을 향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 마블 시리즈가 스탠 리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것처럼, ‘올드 가드’도 그래그 러카의 동명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했다. ‘올드 가드’는 어떤 상처를 입어도 치유되는 초능력의 소유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된 이들은 서로를 찾아내고 함께 새로운 삶에 적응하며 살아온 전사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이 꽤 길다. 적게는 100여년, 많게는 6000여년이다.
‘올드 가드’는 현재 시점에 서서 지금까지의 일을 요약정리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소개한다. 리더인 앤디(샤를리즈 테론)를 중심으로 한 네 명의 동료들이 새롭게 능력을 획득한 나일(키키 레인)을 받아들이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갑자기 얻게 된 자신의 능력을 인지하고 혼란에 빠진 나일을 앤디가 만나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영화가 선택한 설정들이 하나씩 소개된다. 이들을 악용하려는 글로벌 기업에 맞서 싸우는 과정 역시 새로운 연대로 나아가는 발판으로 소비한다.
시리즈를 소개하는 도입부인 영화는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와 선을 긋는 차별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일단 시간의 방향성이 다르다. 마블 시리즈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새로운 공간과 소재를 확보했다. 발전된 과학 기술과 우주를 오가는 스케일은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환호를 받았다. ‘올드 가드’는 지금까지의 역사를 되짚으며 현재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인물들의 초능력을 활용하는 장면이 아니면 이들이 정말 슈퍼히어로인지 구분하지 힘들다.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이 가장 큰 미션이고, 내적인 고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슈퍼히어로답게 세계 평화를 이룩하고 지구를 지키는 업무의 성격은 같지만, 접근하는 태도나 드러내는 양상이 정반대다.
초능력의 숫자와 참신함보다 한 가지에 집중했다. 치유 능력은 모든 걸 바꿨다. 영화는 불멸의 삶을 축복이 아닌 저주로 해석한다. 이들은 잊고 싶은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하고, 죽는 것만 못한 삶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자신들의 다름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다. 능력을 갖게 된 계기가 명확하지 않은 건 종교적인 맥락으로 해석된다. 어느 날 갑자기 선택받은 것처럼 능력이 부여되고, 서로의 상황을 꿈에서 공유한다. 자연스럽게 능력을 부여한 가상의 신을 떠올리지만 의도를 추측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지만, 평범한 삶과 크게 다를 것 없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능력을 옳은 일에 쓰는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지 모를 마지막을 기다리면서.
제작자로도 참여한 배우 샤를리즈 테론의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곧게 편 자세로 가벼우면서도 신중히 걷는 걸음걸이부터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커다란 사건에 미묘하게 흔들리는 표정 등은 그가 살아온 긴 시간 동안 쌓아온 고민의 총량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그 어느 슈퍼히어로보다 신에 가장 근접한 아우라를 보여주지만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아이러니가 영화 전반에 깔려있다. 다양한 국적과 시대를 뒤섞은 전투 방법을 샤를리즈 테론이 뒤섞어 보여줄 때 느껴지는 경이로움은 ‘올드 가드’ 시리즈가 걸어갈 새로운 길을 지켜보고 싶어지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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