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개정 시한이 2개월 남은 ‘낙태의 죄’를 두고 이견이 지속되고 있다. 정부는 임신중단 시술을 조건부 허용하기로 했지만, 여성계·의료계·종교계·법조계는 정부의 결정에 반발했다.
정부, 24주 내 임신중단 허용
임신중단 시술을 처벌하는 낙태의 죄는 앞으로도 법률 속에 잔류한다. 다만, 합법적인 임신중단 시술 기간과 방식이 확대되면서 임신한 여성의 선택권이 강화됐다.
정부는 지난 7일 임신중단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조항을 신설한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은 임신한 여성이 출산을 하겠다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기간을 임신 24주 이내로 설정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여성의 자유의사에 따라 임신중단 시술이 이뤄진다. 15∼24주까지는 임신중단 시술이 조건부 허용된다. 허용 조건은 ▲임부나 배우자에게 유전적 질환이나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성범죄에 따른 임신이나 근친 관계 간 임신인 경우 ▲임부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 ▲사회적·경제적 사유가 있는 경우 등이다. 그동안 불법이었던 자연유산 유도 약물도 개정안의 임신중단 시술 방법에 포함돼 합법화됐다.
임신 24주 이후에는 임신중단 시술이 허용되지 않는다. 기존 법률 속 낙태의 죄가 개정안에서도 유지됨에 따라 임신 24주를 넘긴 여성이 임신중단 시술을 받으면 처벌을 받는다.
종교계·일부 의료인, 전면 반대
일부 종교 단체와 의료인들은 개정안이 생명 경시 풍조를 부추긴다고 반발했다. 생명의 가치를 임신 주수에 따라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총연합(이하 한교총)은 개정안에 대해 “무분별한 낙태 합법화를 통해 생명 경시를 법제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교총은 “인간의 자기 결정권은 자신 혹은 타인의 생명을 해하지 않는 선에서 허용돼야 한다”며 “태아는 어머니의 보호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별개의 생명체로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독교 의사 단체 성산생명윤리연구소(이하 연구소)도 입장문을 통해 모든 임신중단 행위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연구소는 “법률상 낙태의 죄를 폐지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보장하는 선택이 아니다”라며 “임신중단을 마음대로 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여성의 건강·출산권·생명권을 외면하는 인권유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연구소는 “임신중단을 선택하지 않아도 여성이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임신과 출산에 관한 남성의 책임을 강화하는 ‘남성책임법’, 신생아 유기를 예방하는 ‘비밀·익명출산법’과 ‘입양특례법’ 등을 제안했다.
산부인과 전문의 “10주까지 허용”
의료계에서도 개정안을 숙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임신중단 시술 허용 기간은 의학적으로 시술이 여성의 신체에 끼칠 위험을 고려해 설정해야 한다는 우려다.
개정안에 대해 ▲대한산부인과학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직선제대한산부인과의사회 ▲대한모체태아의학회 등은 공동으로 입장문을 발표하고 “임신중단 시술 허용 시기는 임신 10주 미만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 학회와 의사회는 여성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분별한 시술이 이뤄지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는 법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사유의 제한이 없는 임신중단 시술 허용 시기는 임신 10주 즉, 초음파 검사 상 태아 크기로 측정한 임신 일수가 70일 미만일 때로 정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10주 이후의 임신중단 시술은 사회·경제적, 의학적 사유에 따라 제한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제안도 덧붙였다. 아울러 자연유산 유도 약물은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한 후 도입을 검토해야 하며, 도입 시에는 의약분업 예외 약품으로 지정해 산부인과 병·의원에서만 직접 투약하도록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느 누구도 여성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임신중단 시술을 해야 하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며 “법 개정으로 무분별한 임신중단 시술을 막는 한편, 불가피하게 시술을 해야 하는 여성은 안전한 의료 시스템 안에서 제도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전했다.
여성계, 낙태의 죄 전면 폐지 촉구
여성계는 정부가 낙태의 죄를 폐지하지 않았다며 분노했다. 개정안은 일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한 여성의 임신중단을 불법화해 여성의 권리를 위축시킨다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구성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하 모낙폐)은 “정부 개정안은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낙태의 죄와 이에 대한 처벌 조항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위헌”이라고 비판했다.
모낙폐는 임신중단 시술 허용 기간과 방식을 확대해 여성의 선택권을 강화했다는 정부의 설명이 기만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 필요한 것은 임신중단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정부의 대책이지, 임신중단 시술을 허용하는 추가적 조건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여성시민단체가 공동으로 참여한 한국여성단체연합도 “정부는 여성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남성과 국가가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개정안을 발표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사람들이 출산을 결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라“며 ”여성들을 생명의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로 낙인찍지 말라“고 촉구했다.
일부 법조계, 낙태의 죄 완전 폐지해야
법조계 일각에서도 낙태죄를 완전 폐지해야 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은 정부가 개정안을 즉시 철회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민변은 특정한 사유가 있을 때만 임신 중지를 허용하고, 임신 24주 이후 임신중단 시술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개정안 내용이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한다고 분석했다. 민변은 “개정안은 사실상 낙태의 죄를 부활 시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재생산 권리를 침해하는 시대착오적인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개정안이 임신 주 수를 형사 처벌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도 위헌적 요소로 지적됐다. 임신 주 수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명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변은 “정부가 헌법재판소 결정의 핵심을 ‘임신 주 수에 따라 형사 처벌 범위를 정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했다”며 날을 세웠다.
한국여성변호사회도 개정안에 반대했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성명서를 통해 헌재가 언급한 임신중단 시술 허용 기간인 22주를 개정안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임신중단 시술 허용 조건도 더욱 확대해 여성들이 불법 낙태로 내몰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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