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마침내, 지난 11월 국내 첫 여성 록 컴필레이션 음반 ‘위, 두 잇 투게더’(We, Do It Together)가 세상에 나왔다. “눈물 줄줄 뽑으며 경험한 실패와 작은 성공들”(김민정)이 이어진 결과다. 애리·에고펑션에러·향니·아마도이자람밴드·아디오스 오디오·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천미지·황보령·다브다·카코포니·티어파크·빌리카터 등 12팀이 참여했고, 마포구 예술활동 거점지역 활성화사업 추진위원회 ‘예술로 업(業) 사이클(CYCLE)’의 지원을 받았다. 국내 록 음악시장에 중요한 기록을 남긴 김민정과 빌리카터의 김지원, 싱어송라이터 카코포니를 서울 성산동에 있는 카코포니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Q. 지난달 28일에 음반 발매를 기념한 공연을 열었다고 들었어요. 공연은 어땠나요?
“이번 컴필레이션이 어떤 음반인지, 다양하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훌륭하고 멋진 여성 뮤지션이 있는지 잘 보여주는 공연이었어요. 집중도가 높으면서도 마냥 무겁지만은 않은 분위기였죠. 무엇보다 관객 분들의 존재가 감동적이었어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응원하는 분들이 계시고, 심지어 그 수가 많고, 그분들이 열렬하고 것 모두요.”(김지원)
“너무 좋았어요. 감사했고요. ‘이런 기획을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이제 숙원을 털었다…! 도비는 자유에요!’라는 마음이었는데….(일동 웃음) 재작년에 했던 네트워킹 파티를 내년에 다시 해보려고 해요. 살면서 연대가 필요한 순간이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내가 한국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스스로 찾아야 하고요. 우리 여성 록 뮤지션들은 사운드를 진중하게 낼 수 있는 장르적인 특징이 있으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서로 배우면서 그 힘을 서로 키워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보려고요.”(김민정)
Q. 음반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이제 결과물이 나왔으니 앞으로는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지만, 2년 전만 해도 페미니즘과 관련해서는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또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이유도 있었고요. 지원 사업에 선정되는 것도 정말 힘들었어요. 올해에만 기획서를 12개 넘게 썼는데, 7월까지 다 떨어졌어요. 그래도 위위위 기획팀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같이 해보자고 하셔서 결국은 끝을 봤습니다.”(김민정)
“정말 감사해요. 다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그걸 실행으로 옮기는 건 다른 일이잖아요.”(카코포니)
Q. 그러니까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어요?
“안 하면 병이 날 것 같아서.(웃음)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누군가 물어보셔서 저도 생각해봤어요. 왜 이걸 안 하면 죽을 것 같이 속이 상했지? 왜냐면, 저는 인디 신을 너무 사랑해요. 이렇게 훌륭한 음악적인 역량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이 사람들이 좋아요. 저는 여기가 소우주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마다의 빛으로 함께 반짝거리는 곳이잖아요. 이 사람들이 계속 음악을 했으면 좋겠고. 저 또한 같이 성장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김민정)
Q. 음반의 키워드가 ‘분노’였다면서요. 왜 분노였나요?
“2018년부터 생각했던 키워드에요. 한국 여성들의 분노를 사는 일들이 계속해서 드러났던 때였죠.(2018년은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국내에서 ‘미 투’ 운동의 불이 붙었던 때다) 이런 분노를 사운드로 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록 사운드를 시원하게 내는 팀들이 사라지는 게 체감돼 아쉬웠지만…그래도 ‘분노’를 놓을 순 없었어요. 우리의 분노가 제대로 전달된 적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분노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어요.”(김민정)
Q. 다른 두 분은 이 키워드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공감할 수밖에 없었어요. 분노할만한 사건들이 몇 년 동안 쉼 없이 벌어졌잖아요. 이 분노를 제대로 혹은 멋지게 드러낼 방법을 잘 몰랐는데, 드디어 내 분노에 자리가 생겼다고 느꼈어요. 가령 ‘n번방 사건’에도 정말 많은 여성들이 분노했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다들 적응하더라고요. 이번 음반이 그런 분노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어요.”(카코포니)
카코포니가 수록한 ‘소녀’는 폭력의 피해자인 소녀가 더 이상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고 분노하길 바란다는 내용의 노래다. 그는 공연에서 ‘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감정이 분노가 아닌 자책으로 이어지는 걸 보는 게 슬펐다. 많은 소녀들이 분노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곡을 썼다’고 말했다. 김민정은 이것이 “이번 음반의 정서를 꿰뚫는 이야기”라고 봤다.
“‘n번방’ 사건 피해자들도 비슷할 것 같았어요. 소문에 시달릴 것 같았고, 그래서 자책할 것 같았죠. 하지만 그들이 분노하길 바랐습니다. 정당한 분노니까요. 그걸 알아주지 못하는 사회가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었어요.”(카코포니)
“억압된 환경에서 공격당하던 누군가가 자신을 검열하고 스스로 가스라이팅 당하다가, 마침내 분노할 상대를 찾고 자신의 감정을 찾는 과정을 카코포니 씨의 노래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늘 분노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분노해왔어요. 그런데 여성의 분노에는 너무 많은 조건이 붙어요. 분노하는 여성에겐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말하고, 분노의 이유가 확실하길, 그리고 그걸 다시 한 번 설명하길 바라죠. 그게 싫었어요. 화는 당연한 감정인데, 왜 여성들만 그 화를 어렵게 내야 했을까…. 아이러니하지만, 이번 음반을 통해 각자의 서사로 분노의 정당성을 보여준 것 같아요.”(김지원)
Q. 다른 뮤지션들의 음악은 어떻게 들었어요?
“다들 자신의 에센스를 잘 꺼낸 거 같아요. 한 가지 주제(분노)로 만든 음반이지만, 그 감정을 풀어내는 방법이나 접근 방식도 다 다르더라고요. 다양한 서사가 실렸고 사운드적으로도 모두 개성 있어요. 12곡이 다 제 곡이 아닌데도, ‘이것 좀 보세요!’하며 알리고 싶은 마음이랄까요.(웃음) 그리고 이게 전부가 아닐 거예요. 우린 앞으로도 훌륭한 뮤지션을 찾아낼 거고, 서로 네트워킹할 거예요. 자랑스러워요.”(김지원)
김민정은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나와 많이 닮아 있다”고 했다. 아마 여성 대부분은 그처럼 느끼리라. 그가 SNS에 적은 글을 아래에 전한다.
“날 미워하지 말아달라 괴롭히지 말아달라 버티기 위해 낮추야만 했던 나(카코포니-‘소녀’), 불쑥 불쑥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에 두려워하던 나(천미지-‘I've Never Invited Her’),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 할 일들도 슬픔으로 직결되어 자꾸만 죽고 싶지만, 사실은 내 옆의 너와 잘 살고 싶던 나(애리-‘나는 깜빡’), 대체 사랑이란 게 뭔지 괴로운 기분이 멈추지 않았던 (황보령-‘What is Love’), 수많은 밤들과 싸웠던 나(다브다-‘무궁화’)였습니다.
허무함과 분노가 더 이상 나를 갉아 먹지 못하게 명랑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나였고(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사적인 복수’), 애쓸수록 깨어지고 부서지는 마음들을 다독여주고 손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었고(아마도이자람밴드-‘Good Night’), 숨을 뱉으라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하고(아디오스오디오-‘숨’), “이상적인 여성”이 되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가는 방향으로 같이 걸어주겠다는 동료가 있었기에(티어파크 -‘Roll Model’), 안전한 관계 안에서라도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어요(향니-‘솔직하게 말해줘요’). 연대 안에서 훈련된 목소리는 왜 가해자에게 관대하냐며 말도 안 되는 변명하지 말라 꼬집어 말할 수 있게 됐고(에고펑션에러-‘판’), 권력에 무참히 살해된 어린 소녀의 죽음에 즉각적으로 분노하고(빌리카터-‘Hell’) 반복되면 안 될 일들이 무엇인지, 왜 바꿀 수 없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둘러볼 수 있게 됐습니다. 손 잡아주고 같이 걷겠다는 분위기가 있어 길러진 모습이었어요.
이 음반이 부디 2020년을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해방의 실마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wild37@kukinews.com / 사진=박태현 기자, 위위위 기획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