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신민경 기자 =신호음이 한참 울린 뒤에야 연락이 닿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지난달 인터뷰 차 연락드렸던 기자입니다.” 소개가 끝난 뒤 꽤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곧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는 가슴을 북받혀 오르게 했다. 눈물을 머금고 힘겹게 입을 떼는 눈에 선한 그 모습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숨쉬기도 벅찬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삶에 또 한번 절망적인 소식이 찾아왔다. 인체에 유독한 가습기살균제를 제조·판매한 기업들이 죄가 없다는 사법부 판단 말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지난 12일 SK케미칼이 제조하고 애경산업이 판매한 가습기살균제 ‘가습기메이트’ 주성분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이 폐질환이나 천식을 유발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당혹스러운 것은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가습기메이트는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다음으로 많은 피해자를 낸 제품으로 익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가습기 메이트 사용 후 폐기능이 악화했다고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만 2020년 12월8일 기준 979(단독 166명/복수 813)에 달한다.
CMIT·MIT는 듣는 이로 접하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피해야 할 성분으로 흔히 인식돼 있어서다. 정부는 모든 스프레이형 제품과 방향제에 CMIT·MIT 사용을 금지하고 있는데, 지난 2017년 치약, 화장품 등 CMIT·MIT이 포함된 생활화학제품 리콜 조치하기도 했다. 위해 성분으로부터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을 테다.
이 대목에서 자문한다. “그런데, 무죄라고?”
가습기메이트를 제조, 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을 가해 기업으로 규정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도 모두 부정한 결과였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는 판결. 앞으로 CMIT·MIT 등을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 혼란만 감돌 뿐이다.
10년을 싸워 온 피해자들은 무죄 판결 앞에서 무릎 꺾이고 좌절했다. 배보상을 위해 제기한 소송에 어둠이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가습기넷 소속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형사 사건과 연관된 민사 사건인 경우 형사 재판 결과가 민사 재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례”라면서 “먼저 형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다. 앞선 결과를 뒤집은 민사 재판 결과가 나오길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이지만 기업으로부터 피해 보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이다.
SK케미칼, 애경산업 등을 상대로 배보상 소송을 진행 중인 한 피해자 보호자는 “지난달 1차 조정에서 기업들의 진심어린 사과를 기대했지만 이는 몽상에 불과했다”며 “사과 전화도 없었다. 해결 의지는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9년을 싸운 뒤에야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며 “보상을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싸워하는지 감도 안 잡힌다”고 토로했다.
‘무책임한 기업’에 ‘방관하는 나라’라는 프레임이 또 다시 대두됐다. 그 안에 놓여진 피해자들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하다.
언제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가슴에 묻어두고 웃을 수 있을까?
무죄라는 판결을 마주한 지금 감도 잡히지 않는다. “언제까지 몸이 버텨줄 지 모르겠어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는 말했다. 새해를 절망감으로 시작하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올해도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은 먹구름일까’라는 글을 쓰는 기자의 손가락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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