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문대찬 기자 =“‘세트’라고? 저 사람은 ‘이즈리얼’ 같은데.”
드문드문 빗방울이 떨어지던 지난 2일, 세종문화회관 정문 앞은 오랜만에 붐볐다. 가지각색의 코스튬 의상을 입은 수십 여 명이 계단 한편에 자리했고, 이를 향해 모여든 인파는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지나가던 행인들도 홀린 듯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테마 음악 등을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담아낸 무대가 열렸다. 2009년 출시된 LoL은 라이엇 게임즈가 개발한 게임으로, 매달 1억 명 이상의 이용자가 접속하는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 받은 게임 중 하나로 꼽힌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게임 음악회가 열린 건 개관 43년 만에 처음이다. 라이엇 게임즈가 먼저 협업을 제안했고, 이를 세종문화회관 측이 수용해 무대가 마련됐다.
LoL은 160여 개에 달하는 개성 넘치는 챔피언을 보유한 게임이다. 이날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티모’, ‘아무무’ 등 LoL을 대표하는 챔피언들의 대형 풍선 조형물이 자리했다. 이번 공연의 포스터를 장식하기도 한 ‘티모’ 조형물은 특히 인기가 많아서, 기념 촬영이라도 하려면 수분을 기다려야 했다.
차례를 기다리던 기자에게 앞서 있던 남성 관객이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그의 사진을 찍어준 뒤 기자 역시 촬영을 요청해 기념사진을 남겼다. 이후 그와 짧게 얘기를 나눴다.
용인에서 홀로 공연장을 찾았다는 박 모(28)씨는 “LoL을 매일 한다. 시즌2부터 시작했으니까 10년이 됐다. 중간에 게임을 관뒀다가도 다시 찾게 되더라”며 웃었다. 그는 “사실 작년에 오케스트라를 보려고 했는데 취소됐다. 이번에 랭크 게임을 돌리다가 예매 소식이 떠서 바로 신청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공연은 당초 지난해 11월 열릴 예정이었지만 감염병의 대유행으로 한 차례 연기됐다.
박 씨는 평소에도 LoL 관련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전했다. LoL은 게임성 만큼이나 음악, 시네마틱 등에서도 ‘큰 손’으로 통한다. LoL을 대표하는 곡 중 하나인 ‘워리어스’는 미국의 유명 록 밴드 이매진 드래곤스가 참여해 화제를 모았고, LoL e스포츠 최고의 국제무대인 ‘월드챔피언십(롤드컵)’ 오프닝을 장식한 가상 걸그룹 K/DA의 노래는 빌보드 차트에 이름을 올릴 정도다.
박 씨는 “노래 중에 ‘나미’ 테마를 제일 좋아한다. 음악 리스트를 만들어 일할 때 듣고 있다”며 “애인이 음악 관련 직업에 종사 중이다. 애인도 LoL 음악의 텍스쳐나 벌스를 좋아한다. 악기 배합이 참 좋다고 하더라. 꼭 LoL의 노래가 아니어도 들었을 곡들”이라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그와 헤어진 뒤 기자도 미리 예약한 티켓을 수령하기 위해 내부로 입장했다. 입구에서부터 철저한 온도 체크가 이뤄졌고, QR 코드를 이용해 자가 진단서 및 전자출입명부를 작성했다.
로비는 작은 축제를 연상케 했다. 공연 시작까지 1시간을 넘게 남겨두고 있었지만 이미 북새통이었다. 로비 한쪽에 마련된 굿즈 상점 앞으로 피규어 등 기념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상점에서 구매한 ‘티모’ 모자를 쓴 커플들은 곳곳의 포토 스팟에서 셀프 카메라를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방역 수칙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즐거운 교감이 이뤄졌다.
세종문화회관 측에 따르면 2일과 3일, 이틀에 걸쳐 열린 이번 공연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전석이 매진됐다. 일반적인 공연은 여성 관람객 비율이 80%로 매우 높은데, 이번 공연의 경우 남성 관람객 비율이 60%에 달한다. 관객 연령대도 10~30대로 보다 다양하다고 세종문화회관 측은 전했다.인천에 사는 여자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한 남성 관객(24·신당)은 “LoL을 7년 동안 즐겼다. 롤드컵 결승전도 CGV에서 봤다. 코로나 때문에 오프라인으로 LoL을 접할 기회가 적었는데 이런 장소가 마련돼 좋다”며 “LoL 음악을 좋아해서 바로 예매했다. 롤드컵 테마가 가장 기대된다”고 말했다.
세종문화회관 측이 이번 공연을 기획한 이유 중 하나는 관객층 확장이다. 클래식보단 게임이 익숙한 10~30대와의 접점을 만들어 잠재 고객 개발에 힘쓰겠다는 의지다.한 20대 여성 관객은 “노래도 노래지만 이런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는 건 처음이다. 간만에 밖에 나왔는데 내가 좋아하는 걸로 문화생활을 해서 좋다”며 웃었다.
공연 시작 시간이 임박하자 코스튬 플레이어들도 차례로 로비에 들어섰다. 특히 만듦새가 좋은 의상을 입은 플레이어에게 다가가 사진 촬영을 요청하자 흔쾌히 응했다. ‘트루대미지 야스오’ 복장을 한 이 모씨(30·노원구)는 기다란 칼을 칼집에서 꺼내 능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그는 “공연을 보러온 김에 코스프레도 하기로 했다”며 “근 1년간 지인들을 못 봤는데 이렇게라도 보게 돼 좋다. ‘진’ 테마곡을 가장 기대하고 왔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원래 한 게임을 길게는 못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LoL은 10년 동안 했다. 내겐 정말 특별한 게임”이라고 덧붙였다.티켓을 수령한 뒤 시간에 맞춰 대극장에 들어섰다. 좌석은 방역 수칙에 따라 일정하게 배치됐다. 곧이어 관람객이 하나 둘 자리를 찾았고, 이날 공연을 맡은 KBS교향악단이 무대에 등장했다. 지휘는 게임 음악 전문 지휘자로 유명한 진솔(33)이 맡았다. 그는 게임 음악 플랫폼을 운영하는 등 게임 마니아로 통한다.
LoL 플레이어라면 전율을 느낄 ‘어웨이큰’부터 각 챔피언을 대표하는 테마곡이 오케스트라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자 곳곳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무대 위 초대형 스크린에 비치는 LoL의 역대 시네마틱 영상과, 팬 아티스트가 직접 제작한 일러스트는 감동과 몰입감을 더했다.
공연이 고조되자 대형 스크린에 다양한 감정 표현을 담은 이모티콘이 꽃잎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는 공연 중엔 모바일 기기 사용이 금지되지만, 이번 공연에선 관객들이 관람석 스크린에 준비된 QR코드로 접속해 무대와 소통할 수 있게 유도했다. 이러한 ‘인터랙션 콘텐츠’가 도입된 것은 세종문화회관 개관 이래 처음이다. 기자도 하트 가득한 이모티콘을 거푸 클릭해 교향악단의 공연에 화답했다.2부에서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함께 전자악기의 역동적인 멜로디가 대극장을 가득 메웠다. 고전적인 분위기와 강렬한 에너지가 묘하게 어울렸다. 공연에 보컬로 참여한 이찬동(브로맨스), 뮤지컬 배우 유리아의 목소리도 이에 힘을 실었다.
공연은 ‘워리어스’와 ‘2020 월즈 테마’ 연주로 향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흔히 하는 말로 가슴이 절로 웅장해지는 경험이었다. 주변 관객 중 몇몇은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공연이 끝난 뒤 만난 한 관람객은 “오늘 사람이 생각보다 더 많이 와서 놀랐다”며 “편곡을 색다르게 했더라. 공연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고 호평했다.
이날 동행한 강한결 기자는 “한 명의 게이머로서 ‘게임은 문화다’라는 말을 정말 좋아한다. 나의 20대를 함께한 LoL의 음악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듣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 “가장 좋아하는 ‘브라움 테마’를 들었을 때는 소름이 돋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공연이 계속돼 게임이 대중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풍조가 퍼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라이엇 게임즈 관계자는 “디 오케스트라는 우리의 게임 IP(지적재산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용자들과 함께 즐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나온 결과물”이라며 “게임이 더 이상 부끄러운 취미가 아니라 매우 대중적인 ‘인싸 문화’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기획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음악이라는 매개로 게임을 넘어선 외적인 경험까지 이용자에게 선사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팬들의 반응을 보고 보람찼다. 부족한 부분도 있었겠지만 첫 시도라는 데 의의를 두고 싶다. 향후에는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기획으로 찾아오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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