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정치권에서 여성가족부의 존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야권 대선후보를 자처하는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하태경 의원, 이준석 대표 등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거론하며 유권자의 이목을 끌기에 나섰다. 이들이 앞세운 근거는 실적부진이다. 여성가족부의 성과와 기능이 명확하지 않으니 존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애당초 여성가족부에 성과를 낼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을까.
올해 18개 중앙부처 가운데 여성가족부 예산은 가장 적다. 추가경정예산을 제외하면 1조2325억원이 편성됐다. 전체 정부 예산 555조8000억의 0.2%다. 가장 많은 예산을 확보한 부처는 보건복지부(89조5766억원)이다. 교육부(76조4645억원)와 행정안전부(57조4451억원)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의 예산은 1조1191억원이었고, 당연 18개 부처 중 최소 규모였다. 부처별 예산 규모는 정부가 상정하는 중요과제의 우선순위를 반영한다.
여성가족부가 예산을 1조원 이상 확보하기 시작한 것은 올해로 3년째다. 설립 이래 약 20년 만인 2019년 처음으로 1조801억이 편성됐다. 이전까지는 ▲2018년 7641억원 ▲2017년 7122억원 ▲2016년 6383억원 수준이었다. 전체 정부 예산 가운데 2018년(428조8000억)은 0.17%, 2017년(400조5000억)은 0.17%, 2016년(386조4000억)은 0.16%가 여성가족부에 주어졌다.
여성가족부는 작은 예산으로 작은 성과를 도출해 왔다. 올해 0.2%의 작고 소중한 예산을 받은 여성가족부는 이를 다시 5조각으로 쪼갰다. 이를 가족정책, 청소년정책, 여성정책, 권익정책과 행정지원 등 5개 분야에 할애한다. 여성가족부 고유업무 성격이 짙은 정책 분야는 여성정책과 권익정책이다. 가족정책과 청소년정책은 보건복지부, 교육부와 중첩되는 분야다.
0.01% 주고 경력단절 막아봐라?
올해 순전히 여성정책에 사용되는 예산은 982억이다. 천제 정부 예산의 0.01%다. 여성정책은 임신·출산·육아·가사노동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을 예방하고, 경력단절 여성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여성정책의 대표 사업은 여성새로일하기센터(이하 새일센터)다. 새일센터는 2009년 시범사업으로 시작해 현재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에 159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새일센터는 새일여성인턴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경력단절 여성에게 민간기업 인턴 근무 기회를 제공한다. 새일여성인턴의 월급 중 80만원은 여성가족부가 지원한다. 인턴이 정규직으로 전환돼 6개월 이상 고용을 유지하면 기업에는 80만원, 인턴에게는 60만원의 장려금이 지급된다. 지난해 새일여성인턴 정원은 6177명이었지만, 올해 7777명까지 확대해 1600명이 더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전체 정부 예산의 0.01%를 투입한 결과물이 화려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3년마다 실시하는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2019년 조사에서 여성 노동자의 35%는 경력단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2016년 조사 당시 수치 40.6%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여성 3명 중 1명은 경력단절을 겪었다. 경력단절 여성이 재취업에 성공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2019년 조사에서 7.8년으로 파악됐다. 2016년 조사의 8.4년보다 7개월가량 단축됐다.
해외의 상황은 다르다. 해외 주요 선진국은 여성의 경력단절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보다 많은 돈을 투입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이 OECD 여성 고용지표를 분석한 결과,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G5국가가 여성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쓰는 모성보호 관련 공공지출은 GDP대비 평균 1.5%다. 우리나라는 0.4%다. 15세 미만 자녀를 둔 15~64세 여성의 고용률은 G5국가 평균 72.2%, 우리나라는 이보다 저조한 57%다.
0.0005% 줄 테니 여성폭력 해결을 ‘요청’해라?
여성가족부의 또 다른 정책분야 '권익정책'에 사용되는 예산은 1234억이다. 전체 정부 예산의 0.02% 수준이다. 권익정책은 성매매·성폭력·가정폭력 등 주요 여성폭력범죄의 피해자 보호가 골자다. 해바라기센터와 여성의전화를 운영하며 피해자에게 법률·의료·상담지원을 제공한다. 필요에 따라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주거공간도 지원한다.
특히, 2018년부터는 디지털 성범죄 대응 업무가 추가됐다. 여성가족부 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를 개소하고, 인터넷상에 유포된 피해자의 영상물 삭제를 지원한다. ‘2021년도 여성가족부 소관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 개요’를 보면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올해 예산 내역은 인건비·운영비·사업비를 포함해 145억7400만원이다. 사업비 가운데 ‘여성폭력피해자 인권보호’와 ‘여성폭력방지 및 현장지원’ 명목의 금액은 32억200만원이다. 전체 정부 예산의 0.0005%다.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 주어진 권한은 미미하다. 할 수 있는 일은 삭제 ‘요청’에 그친다. 피해자 영상물의 유포 상황을 파악하고, 영상물이 게시된 사이트에 삭제를 요청한다. 사이트 운영자가 요청을 무시하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위)에 차단을 요청한다. 방통위가 심의를 통해 요청을 받아들이면 영상물은 접속이 차단된다. 삭제를 강력히 명령하거나, 요청에 불응한 사이트 운영자에 불이익을 줄 수단은 요원하다.
적은 예산과 작은 권한을 밑천 삼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는 지난해 4973명의 피해자를 지원했다. 2019년 2087명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인터넷에 유포된 피해자의 영상물을 삭제한 실적은 총 15만8760건으로 2019년 9만5083건 대비 67%가량 증가했다. 앞서 센터가 최초로 운영되기 시작한 2018년에는 4월부터 12월까지 2만8879건의 영상물을 삭제했다.
이 같은 실적은 지난해 기준 정규직원 17명과 기간제직원 50명에게서 나왔다. 기간제직원의 계약기간이 4개월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 인력은 연중 33명 수준이다. 직원 한 명이 150명의 피해자를 담당하는 극한의 가성비 운영이 이뤄진 셈이다. 올해 센터 총원은 오히려 감소했다. 정규직원은 22명으로 늘었지만, 기간제직원은 17명으로 축소됐다. 피해자의 영상물을 지속적으로 보게 되는 센터 직원들의 심리적 소진을 방지하기 위한 지원 예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2000만원이다.
예산과 권한 부족에 대한 문제는 꾸준히 지적됐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0월 여성가족부 국정감사, 12월 정영애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거듭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예산 증액과 권한 확대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 의원은 “인력 증원과 정규직화, 전문성 강화, 심리 치료를 통한 심리소진 방지 등을 위한 전반적인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센터의 법적 근거인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는 불법 촬영물을 직접 삭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삭제를 지원할 수 있다’로 규정돼 센터의 삭제 업무가 실질적인 피해 지원에 한계가 있다”며 “디지털 성범죄 지원센터의 법적 근거 마련과 불법 촬영물 삭제 권한 부여를 위한 법 개정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해외 상황과 비교하면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는 빈주먹으로 전쟁에 나간 처지다. 사이버커뮤니케이션학회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해외 주요국의 제도적 대응 실태조사’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인터넷안전위원회’를 설치하고 2018년 기준 운영 예산만 480만 호주달러(한화 40억원)를 투입했다.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예산으로는 별도로 1000만 호주달러(82억원)를 투입했다. 인터넷안전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예산과 권한이 집중된 컨트롤 타워로 기능한다.
호주 인터넷안전위원회는 ‘온라인안전강화법’에 근거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다. 글로벌 디지털 성범죄 정책 연구소의 ‘해외 주요국 디지털 성범죄 정책 실태 조사를 통해선 본 국내 디지털 성범죄 대응방안의 한계점과 개선과제 고찰’에 따르면, 호주에서 인터넷안전위원회의 불법 영상물 삭제 명령에 48시간 이내에 불응하면 개인에게는 최대 10만5000호주달러(9000만원), 기업은 52만5000호주달러(4억5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한다. 이에 따라 피해자가 여러 차례 수사기관과 만나거나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영상물이 신속히 삭제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호주 통신미디어청과 인터넷안전위원회의 ‘2018-19 연례보고서’ 집계에 따르면 인터넷안전위원회의 삭제 명령 90%가 처리됐다.
부처 기능 몰이해 만연… 성차별·여성폭력 ‘없는 셈’ 치려는 폐지론자들
‘성과 부진’은 부처 폐지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한국여성변호사회는 “여성가족부의 역할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여성가족부의 폐지로 해결될 사안이 아닌, 역할 개선으로 풀어야 하는 문제”라고 성명을 통해 강조했다. 협회는 “여성가족부가 남녀갈등을 조장하는 부처라는 일부의 견해에 정치권이 동조해, 부처 자체를 없애겠다고 나선 것은 여성가족부에 대한 몰이해의 결과”라며 “여성가족부가 담당하는 저출산 문제, 다문화가족 문제, 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문제는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회 구성원 전부의 숙제”라고 부연했다.
정치권이 여성가족부 존폐 논쟁을 표심 몰이 도구로 꺼내 든다는 비판도 이어졌다. 협회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한 야권 정치인들을 겨냥해 “여성가족부의 개선방향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은 하고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폐지론자들은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라고 날을 세웠다. 이어 “젠더갈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 젠더갈등에 편승해 정치적 반사이익을 얻고자 꼼수를 부린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에는 성별에 기반한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묵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는 “여성가족부는 젠더에 기반한 불평등을 수정하는 구심점이며 가족·다문화 정책도 도맡고 있지만, 여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부처라는 프레임에 갇혀있다”며 “여성가족부를 없애자는 주장은, 이 부처에서 현안으로 상정했던 성차별·여성폭력 문제도 더 이상 사회적 문제로 공론화하지 말자는 의미다”라고 말했다.
여성가족부의 기능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권 대표는 “그동안 여성가족부 폐지는 특정 정치권과 성별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공약으로 되풀이됐다”며 “여성가족부가 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지 복기하는 시간은 한 번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 현안이 무엇인지에 따라 각 부처에 배분되는 예산과 권한의 크기가 결정된다”며 “지금까지 여가부에 어느 정도의 권한, 지위, 자원이 주어졌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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