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이준범 기자 = 자유롭게 헤엄치던 문어가 손을 내민다. 손이 아니라 다리인가. 손인지 팔인지 다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인간에게 내줬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몸에 달라붙은 문어를 떨어질 줄 모른다. 호흡을 위해 수면 위로 올라가는 동안에도 꼼짝 않는다. 다른 존재와 함께 낯선 공간으로 떠오르는 순간, 문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영화를 끝까지 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감독 피파 에를리쉬, 제임스 리드)은 세계를 돌며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지친 크레이그 포스터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울증까지 찾아오자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 그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남아공 케이프타운 해안을 찾는다. 매일 차가운 바다로 들어가 헤엄치던 그는 우연히 온 몸에 조개를 뒤덮은 문어 한 마리를 만난다. 지나갈 줄 알았던 문어와의 인연은 다음날, 그 다음날로 이어진다. 둘은 매일 깊은 바다에서 우정을 쌓는다. 서로 마음을 조금씩 열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문어를 보호해야 한다는 지구 환경 교훈담도, 문어가 가르치는 뭔가를 인간이 배우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연히 어느 문어를 만나게 된 한 남자의 경험담이 내용의 전부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는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종류의 것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벌어지는 배경, 매 순간을 끈질기게 담아낸 카메라의 집념이 대단하다. 바다 속 세계를 그대로 체험하는 시간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문어 역시 보통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문어를 만나기 위해 수온 낮은 바다 속으로 매일 들어간 이유가 조금씩 이해된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잊지 못할 순간이 많은 영화다. 그 중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주인공 문어가 파자마 상어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다. 문어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 천적인 상어에 맞선다. 그 동안 카메라를 손에 쥔 감독은 아무 말이 없다. 바다 생태계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멀리서 지켜만 보는 것이 그의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문어와 인간의 교감에 빠져들던 시청자들은 그제야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한다. 긴 시간 조심스럽게 우정을 나눈 문어가 고통 받는데도 왜 아무것도 하지 않지 싶다. 고민하고 흔들리면서도 제 자리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카메라의 떨림이 그대로 전달된다. 문어와 문어를 담는 카메라 사이의 긴장감이 시선을 잡아끌고 깊은 고민에 빠뜨린다. 이 영화는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가. 어떤 이야기를 담으려 하는가. 자연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문어를 인간화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문어가 하는 행동을 인간에 비유하거나, 인간의 시선에 맞춰 이해하는 척하는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동물의 속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자연이 마치 인간 세계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성우들의 대사와 연기로 보여주는 ‘동물의 왕국’과 다르다. 영화는 여러 근거를 통해 가설을 세우고 유추한다. 잘 모르는 문어의 시선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문어가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은 행동들을 보여주는 놀라운 순간이 다다르면, 자연의 경이로움이 화면에 가득 담긴다. 영화가 끝난 후 남은 진한 여운은 낯선 존재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다가간 결과물이다. 쉽고 인위적으로 접근했다면 모두가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제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나의 문어 선생님’은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다. 처음엔 얼마나 잘 만든 다큐인지 궁금해 관심을 가졌지만, 영화를 본 후엔 그저 ‘이제 문어를 먹지 못하게 된 사람의 모임’에 자동 가입하게 됐다. 사람에 지쳐 있고, 낯선 곳에서 낯선 존재를 만나고 싶은 시청자에게 추천한다. 해산물, 그중에서도 문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시청자에겐 다른 다큐멘터리를 권한다.
많은 구독자의 넷플릭스 목록에 띄워놓아야 하는 다큐멘터리다. 다음에 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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