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계의 서정시인 넬은 어쩌다 ‘위험한 길’을 상상하게 됐을까. 김종완은 “끌림은 크지만 타이밍이나 상황이 적절치 못해 불안하고 두려운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22년째 넬 음악을 작사·작곡해온 그는 매혹적이지만 불길한 관계를 주제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듯 음반을 완성했다. 그는 “감정이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과정을 음반에 담았다”며 “감정이 흐르는 과정을 따라갈 수 있도록 트랙을 나열해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게끔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음반 제목을 ‘모먼츠 인 비트윈’(Moments in between·사이의 순간들)으로 지은 이유도 “각 트랙이 과정 안에 담긴 순간의 조각”이라고 여겨서다.
6분30초 동안 펼쳐지는 ‘위로’는 넬의 야심과 자신감이 돋보이는 노래다. 1막은 꿈결처럼 시작해 잔잔하게 이어가다가 2막에선 관현악 연주를 데려와 웅장하고 엄숙한 풍경을 빚어낸다. 소속사 스페이스보헤미안에 따르면 1막은 아름다움을, 2막은 그 아름다움이 안고 있는 위태로움을 표현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 곡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영상에는 ‘위로(危路)에 선 내게 위로(慰勞)를 준다’ ‘장엄함이 느껴진다’는 감상평이 줄을 잇는다.
“10년 전이었다면 멜로디가 선명하고 듣기 편안한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정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번엔 음반을 대표할 수 있는 사운드를 고르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 부합한 곡이 ‘위로’였습니다.” 웬만한 유행가보다 두 배는 긴 재생시간, 연주로만 채운 후반부 등 히트곡 문법을 벗어난 노래지만 넬은 개의치 않았다. “대중성은 우리가 감히 판단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봐요. 그리고 저희가 듣기에는 ‘위로’도 충분히 대중적인데…. 듣는 분들도 그렇게 느끼셨으면 좋겠네요.” 김종완은 웃으며 말했다.
또 다른 타이틀곡 ‘유희’에선 넬의 색채가 한층 진하게 묻어난다. 컴퓨터로 프로그래밍한 사운드와 실제 악기 연주가 조화를 이뤘다. 넬은 팬들 앞에서 공연하는 날을 상상하며 이 곡을 썼다고 한다. 이밖에도 상대에게 빠져드는 순간을 포착한 ‘크래시’(Crash)부터 관계의 파국을 담은 ‘소버’(Sober)까지 총 10곡이 음반에 실렸다. 이재경은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음반”이라며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순서대로 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노랫말 역시 음반을 이어 들어야 의미가 드러나게끔 설계됐다. 김종완은 “음반을 다 듣고 나면 (가사에 쓰인) 단어가 어떤 단어인지 느껴지도록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1999년 결성한 넬은 20년 넘게 멤버 교체 없이 활동해온 보기 드문 밴드다. 어릴 적 한동네 살던 죽마고우가 뭉친 덕도 있지만 “음악 작업을 할 땐 프로의 자세를 갖춰서 서로에게 ‘돌직구’를 날릴 수 있다는 것”(김종완)이 생명력을 이어온 비결이다. 오랜 시간 곁을 지킨 팬들은 ‘넬의 다섯 번째 멤버’로 불러도 넘치지 않는다. 넬은 오는 10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공연을 열고 팬들에게 신보를 라이브로 들려줄 계획이다.
“‘위로’ 가사 중에 ‘아름답구나 그대’라는 구절이 있어요. 부르면서 여러 감정이 들었죠. 아름답다는 표현은 좋은 의미인데, 한편으론 씁쓸하고 슬프기도 했어요. 그 소절을 팬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다른 의미에서는 이 구절로 힘을 주고 싶어요. 코로나(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블루로 다들 힘들고 지친 시기잖아요. 그 때 이 가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김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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