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탈린=쿠키뉴스] 한성주 기자·홍지희 객원기자 =“아, 정말요? 믿기 어렵네요.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모든 의약품에 당연히 점자 표시가 있습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자신에게 필요한 약을 직접 찾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A씨는 한국에서 유통 중인 대부분의 의약품에 점자표시가 없다는 기자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의약품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장애 여부에 따라 차별적으로 보장되는 상황이 기묘하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에스토니아에는 수 많은 시각장애인이 있고, 이는 한국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며 “누구나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읽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사회와 정부의 의무다”라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약 15년 전부터 시각장애인이 타인의 도움 없이 필요한 의약품을 복용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2004년 3월 의약품 포장 지침을 개정하면서 점자표시를 의무화 했다. 의약품 특성상 점자표시가 어렵거나 환자 단체의 요청이 있는 경우, 음성 파일처럼 시각장애인에게 적합한 형태로 의약품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성분이나 함량이 두 가지 이상인 의약품은 해당 정보까지 점자로 기재하도록 했다.
덕분에 시각장애인들은 혼자서도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진통제가 필요한데 속쓰림이 걱정된다면 저함량 제품을, 빠른 효과를 원한다면 연질캡슐 제품을 집어 복용하는 일상적인 자유가 비장애인과 시각장애인 모두에게 평등하게 보장된다. 이런 평등은 유럽에서 대수롭지 않은 사회 인프라로 자리잡았다. 탈린에 거주하는 대학생 B씨는 “장애인은 명백히 사회의 일부이며, 모든 사회 구성원은 가능성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며 “시각장애인이 항상 활동보조사와 함께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상적 공간 어디든 점자체계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상황은 15년 전 유럽보다 뒤쳐져 있다. 기업의 도의적 책임감에 시각장애인의 안위가 갈리는 실정이다. 현행 약사법에는 의약품 표시정보를 점자와 수어로 제공할 의무를 명시한 조항이 없다. 시행령에서만 제품 명칭 등을 점자표기로 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기 때문에 준수하지 않아도 불이익이 없다.
느슨한 제도를 따르는 기업은 당연히 드물었다. 한국소비자원이 2019년 일반의약품 생산실적 상위 30개 제품, 수입실적 상위 20개 제품, 안전상비 의약품 13개 제품 중 구입 가능한 58개 제품의 점자표시 여부를 조사한 결과, 점자표시가 있는 제품은 16개(27.6%)에 불과했다. 일반의약품 45개 중 12개 제품(26.7%), 안전상비의약품 13개 중 4개 제품(30.8%) 등에 점자표시가 있었다. 같은해 국내 등록 시각장애인 인구는 25만3000명으로 파악됐다.
점자표시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약국가의 고민도 컸다. 이동근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사무국장은 “아침, 점심, 저녁에 복용할 약을 모두 나눠 재포장하고, 알약들의 모양과 크기를 각각 설명하는 등 시각장애인 환자에게는 상당히 세심한 복약지도가 필요하다”며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약에 대한 설명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는 서비스도 개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뒤늦게나마 국내에서도 의약품 점자표시를 확대할 기반이 마련됐다. 앞서 6월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 최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각각 발의한 법률안 18건을 통합‧조정한 약사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법률안은 안전상비의약품과 식약처장이 정하는 의약품‧의약외품의 용기·포장 또는 첨부문서에 안전정보를 점자, 음성, 수어 영상 변환용 코드를 표시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법은 오는 2024년 7월부터 시행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과 사회적 합의가 남은 과제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은 “의약품 점자표시를 의무화하는 법안은 시민사회가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한지 10여년만에 우여곡절 끝에 올해 통과됐다”며 “점자표시의 필요성과 시각장애인의 고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시각장애인이 매일 투약하는 안약과 순간접착제는 점자표시가 없다면 구분할 수 없다”며 “점자표시 의무화는 특정 소수 집단을 위한 시혜적 조치가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 사회제도라는 이해가 공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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