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 풍경 속에는 그리움과 향수가 가득 배어 있다. 쿠키뉴스는 오래 전 시간이 멈춘 듯 한 정겨운 고향 마을과 도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골목풍경, 근대문화유산, 전통의 맥을 잇는 사람들을 찾아 ‘레트로 감성 여행’을 떠난다.
1000여개의 봉제 관련업체가 어우러져 활기 넘치는 한국봉제 산업의 중심, 종로구 창신동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재단사의 가위질과 노(老) 미싱사의 숙련된 박음질, 단춧구멍에 바늘을 꿰는 어머니들의 손놀림이 오늘도 분주하다.
좁고 경사도 심한 골목길을 눈발을 헤치며 원단부터 완성된 제품을 숨 가쁘게 실어 나르는 이륜·삼륜 오토바이들, 소녀들이 새벽까지 재봉틀을 돌리던 지난 시간을 배경으로 새로운 시간을 재봉하는 ‘창신동 봉제거리’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았다.
[제7회] ‘재봉틀 소리 정겨운’ 창신동 봉제거리
- 서울에서 가장 활기찬 골목 중 한 곳
- ‘미싱사·시다(초보환영) 구함’ 옛 모습 그대로
- 미로처럼 얽힌 길에는 사람 냄새 물씬
- 재단·재봉 등 전문 인력 양성 시급
“나는 진실하게 살려고 애썼다. 또 나는 나의 고난의 길에서 인내력을 길렀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화가 박수근(1914~1965)은 1953년부터 창신동에 살면서 화가로서 전성기를 지냈다. 그는 창신동에서 서울의 판잣집, 달구지에 짐을 실어 나르거나 장사하는 사람들, 골목길에서 노는 아이들, 아기 업은 소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행상을 하거나 노점에서 장사하는 여인들, 개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그렸다.
박수근이 살았던 60년 전 창신동의 판잣집은 콘크리트 연립주택으로 바뀌고 흙길은 시멘트 포장으로 바꾸었지만 그 때처럼 창신동 언덕과 골목길에는 지금도 서민들의 땀방울은 이어지고 있다.
구찌, 객공, 시다, 오바로구, 시야기, 지그재그, 날라리, 시보리, 자크... 알 듯 모를 듯 한 일본어투의 상호와 구인광고가 담벼락을 장식한 종로구 창신동 골목에 들어서면 여기저기서 담장을 타고 하얀 수증기가 피어난다.
“저기 수증기가 나오는 집은 모두 봉제공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수증기가 나오는 것이 일을 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창신동에서 50년을 살았다는 김미순(72) 할머니가 봉제업체를 찾은 기자에게 말을 건넨다.
동대문시장에서 흥인지문을 지나 만나는 창신동에는 70년대 동대문 평화시장 내 봉제공장이 이전한 이후 지금까지도 크고 작은 봉제공장들이 밀집해 있다.
‘드르륵~ 드르륵’ 가정집처럼 보이는 다가구 건물 앞에 서서 귀를 세워보면 앞뒷집, 윗집과 아랫집 할 것 없이 미싱(재봉틀)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80년대 활발한 내수시장 덕에 쏟아지는 물량을 대기 힘들 정도로 번창하던 창신동의 봉제공장은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에서 값싼 제품이 밀려들어오면서 그 숫자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신동에는 골목마다 지금도 약 천 여개의 봉제공장들이 바쁘게 돌아가며 전국에서 가장 높은 밀집도를 자랑한다. 한창 때는 3천여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단을 자르는 재단부터 재봉작업, 다림질과 포장까지 전 과정이 이곳의 크고 작은 작업실에서 이루어진다.
창신동의 하루는 ‘부르릉, 부르릉’ 부지런한 이륜·삼륜 오토바이와 짐자전거의 행진에서 시작된다. 돌돌 말린 긴 원단 두루마리와 완제품을 싣고 쉴 새 없이 좁고 경사도 심한 골목을 오가는 오토바이들이 창신동의 하루를 박음질하고 있다. 동대문 원단 도매상에 주문한 원단은 재단사가 있는 패턴공장에서 바지며 치마, 재킷, 각각의 디자인에 맞춰 재단된다. 디자인된 옷본에 따라 재단된 원단은 ‘재봉 작업장’으로 넘어간다.
봉제 산업의 꽃인 재봉사들의 숙련도에 따라 제품의 완성도가 결정된다. 창신동의 재봉사들은 오랜 기간 갈고 닦은 기술로 각자의 실력을 뽐낸다. 세계적 패션몰이 밀집된 동대문 패션의 시작은 창신동 재봉사들 손끝에서 탄생한다. 재봉질이 끝나면 단추를 달거나 세탁하고 다림질 등 마무리 공정을 맡은 시야개집(마무리 집)에서 주문 수량에 맞춰 포장되어 당당하게 창신동을 출발한다.
창신동은 동대문패션타운의 배후 생산기지로서 전 세계에 얼마 남지 않은 도심 제조업 지역이다. 도심 제조업의 기반 악화는 패션 중심지로서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기에 한국 패션 산업을 지탱해주고 있는 창신동이 존재는 여전히 중요하다.
‘창신동 647번지’ 일대는 살아있는 봉제거리박물관이다. 1900년대 동대문시장의 전신인 광장시장은 한국사람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1910년대 일제가 채석장을 개발하고 창신동 돌산에서 캐낸 화강암으로 서울역, 서울시청, 조선총독부 등을 건축했다. 그래서 이 마을의 또 다른 이름이 ‘절벽마을’이다.
1920년대 들어서는 일제 경성부가 채석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인부용 숙소와 도시형 한옥이 건립되고 소규모 공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전쟁 기에 광장시장이 의류시장으로 일어선다. 1960년대에 창신동에 동대문아파트, 낙산시민아파트가 들어서고 공장과 상가가 복합된 평화시장이 성공을 거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쟁으로 노동자 인권문제가 개선된다. 70년대에 부자재전문시장인 동대문 종합시장이 들어서고, 봉제공장의 창신동 유입이 시작된다. 80년대 다가구 다세대 주택이 건립되면서 봉제공장의 밀집이 가속화되었다. 1990년대에는 밀리오레, 두타 등 대규모 의류 쇼핑몰의 성장으로 동대문 패션시장이 글로벌 패션시장으로 성장한다.
40년 경력의 장인 ‘청인 바느질공방’의 김미경(59) 대표에게 창신동의 의미를 물었다. 한마디로 “창신동은 활력소”라고 말한다. 창신동 봉제거리는 항상 빠르다. 계절을 앞서 움직이고 시장의 흐름에 맞추다 보니 활기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는 일이 힘들거나 우울한 마음이 들 때면 창신동 골목길을 걷는다.
“안보이듯 해도 늘 돌아가는 힘찬 미싱소리, 스팀다리미가 내뿜는 하얀 수증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오토바이 행렬... 모두가 멈추지 않고 바삐 돌아가는 모습 속에서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백년소상공인으로도 선정된 김미경 대표는 “애착이 가는 옷에는 따뜻한 기억이 있고 포근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면서 “바느질은 내 자존심이다. 자존심은 속도가 아니고 품질”이라고 말한다.
숙녀복 재단과 재봉 전문업체인 유정사를 운영하는 임성규(56)·김현주(51)씨 부부는 봉제공장의 재단사와 미싱사로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사훈이 ‘최상의 서비스’이다. 최상의 서비스로 고객을 맞이한다. 최고의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늘 연구하고 새로운 기술을 연마한다. “디자이너의 설계대로 만든 패턴을 자르기만 한다면 발전이 없다”는 임 재단사는 디자이너의 마음을 읽고 봉제사의 봉제 편의와 완성품을 염두에 둔 재단을 한단다.
김현주 씨는 “일이 많아 밤잠도 못자고 재봉틀만 돌린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일감이 없어 종일 재봉틀만 바라보고 있던 날들을 생각하면 밤새워 일했던 시간들이 훨씬 행복하고 힘든 것도 감사할 뿐”이라며 “두 아들을 충분히 뒷바라지 못해줬는데 아버지의 성실성을 본받아 안정적인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한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해 30평이 넘는 공장도 소유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주변에 함께한 이웃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말한다. 부부가 늘 감사를 입에 달고 사는 이유이다.
창신동 비탈길과 골목길 사이사이에 위치한 수많은 봉제공장에는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성공신화와 아쉬운 실패 사례가 넘친다.
부친의 가업을 이어받은 라성사 진수진(31) 대표는 “부친이 뇌출혈로 쓰러져 갑자기 가업을 잇게 되었다. 전공인 무용을 못하게 되어 아쉬웠지만 아버님이 평생 일궈놓은 사업을 내 손으로 접을 수는 없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부친의 전성기 못지않게 사업은 잘 되는 편”이라며 “하지만 미싱과 재단 등 전문분야 기술자들은 대부분 고령인데 새롭게 기술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없어 걱정이다. 향후 이 같은 전문 인력을 어떤 방법으로 양성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 사는 냄새 물씬한 창신동 골목에는 일이 있고 땀이 있고 숙련가의 자부심이 넘쳐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안에는 각자의 기술로 완성된 부품들이 마을을 돌며 재봉질 하듯 이어진다. 누구 하나 자신의 역할을 소홀히 하면 완성될 수 없는 시스템이다. 창신동 647 일대 봉제거리박물관은 자신의 책임을 다한 후에 이웃의 기술력, 땀과 정성으로 하나하나 완성되어지는 협업의 마을이다. 하는 일은 다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서로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정이 흐르는 공동체 마을이다. 서로의 어깨를 비비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희망의 그루터기이다.
창신동 봉제타운은 실과 바늘로 천을 이어서 옷이 완성되듯 천여 개의 업체가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미래를 향해 실타래처럼 돌아가는 소통과 공감의 마을이다.
글‧사진=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