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나아가는 콘텐츠 배리어 프리

천천히 나아가는 콘텐츠 배리어 프리

기사승인 2022-02-28 06:00:08
지난 3일 KBS 9시 뉴스는 제2회 한국 수어의 날을 맞아 앵커와 수어 통역사가 함께 수어로 클로징 멘트를 전하며 화제가 됐다. 방송화면 캡처

지난 3일 KBS 9시 뉴스 마무리는 평소와 달랐다. 홀로 화면 정중앙을 차지하던 앵커는 화면 왼쪽에 자리했다. 아래쪽 작은 원 안에만 위치하던 수어 통역사는 앵커와 같은 비중으로 화면 오른쪽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음성과 수어로 함께 뉴스를 끝마쳤다. “서로 조금씩 다른 모든 사람들이 수어로 다 같이 반짝이는 날을 기대하면서 오늘 9시 뉴스 마무리하겠습니다.” 수어 통역사의 표정과 동작은 어느 때보다도 잘 보였다. 같은 날 지상파 방송 3사가 주관한 대선 후보 TV 토론회에는 또 다른 수어 통역사가 사회자와 후보 4명의 통역을 전담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화면 오른쪽 하단의 작은 원 안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5명의 이야기를 바쁘게 옮겼다. 이날은, 제2회 한국 수어의 날이었다.

최근 방송가와 OTT 등 콘텐츠 시장의 주요 화두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다. 고령자, 장애인 등 소외계층도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물리·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뜻이다. 공연계를 중심으로 펼쳐지던 이 움직임은 미디어 업계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제도를 정비 중이며, 콘텐츠 업계는 관련된 준비에 한창이다. 

방통위, 배리어 프리 정책 마련 골몰… 한계점 지적도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는 지난해 10월 소외계층 미디어 포용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새 비전을 제시했다. 5년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계획은 △ VOD·OTT 등 비실시간 방송에 장애인방송 의무화 △ 장애인방송 의무편성비율을 현행 5%에서 선진국 수준인 7% 이상으로 선도 △ AI 기반 아바타 수어과 같은 디지털 기술 혁신 등을 통해 소외계층의 미디어 접근성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방통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올해는 세부 추진 계획을 마련하는 단계”라면서 “장애인방송 편성 확대안도 검토 중이다. 의무 부과를 위한 법제화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장애단체는 이를 두고 “취지는 좋으나 아쉽다”는 목소리를 냈다. 방통위가 지상파 수어 통역 방송을 5%에서 7%로 올리겠다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조사한 지상파 수어 통역 비율(2019년 기준)은 KBS 8.8%, MBC 7.45%, SBS 7.1%로 평균 7.8% 수준이다. 방통위 정책에 대해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냈던 장애인 인권단체 장애의벽을허무는사람들(장애벽허물기)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으로 재난방송 비율이 늘며 현행 수어 통역 방송 비율도 7~8%로 올랐다”면서 “방통위가 언급한 현행 5%는 2012년 장애인방송고시 제정 당시 기준”이라고 꼬집었다. 방통위 측은 “수어 통역 방송은 수어 통역사 확보와 기술 지원으로 인한 제작비 상향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서 “편성을 확대하는 부분은 현재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넷플릭스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대화뿐만 아니라 모든 음성 내용을 문자로 표시하는 폐쇄 자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배리어 프리 중요성 알지만… 비용·저작권 문제 걸림돌

배리어 프리는 지상파와 OTT 업계의 새로운 과제다. 지상파 방송국들은 2020년부터 뉴스에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예능, 교양 등 일반 프로그램은 배리어 프리와 거리가 멀다. 지상파 관계자들은 “일부 프로그램에 한해 오디오 화면 해설과 자막 제공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여러 이슈가 있어 아직은 뉴스에 한해서만 수어 통역을 진행 중”이라고 입을 모았다. OTT는 이보다 더 나아가 배리어 프리를 위한 세부 서비스를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OTT 넷플릭스는 배리어 프리에서 가장 앞서있다. 경쟁사에 비해 수익 규모가 크고 자체 제작 콘텐츠가 많아 CC 자막과 음성해설 도입이 더욱 수월하다. 현재 넷플릭스는 오디오 화면 해설과 폐쇄자막(CC), 텍스트 음성변환 기술(TTS 호환), 다이나믹 타입(저시력자를 위해 활자 등 그래픽 화면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기능) 서비스 등을 완비하고, 애플리케이션과 웹사이트 등 서비스 전반에 시·청각 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국내 OTT 업계 사정은 다르다.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만큼 보유·독점 콘텐츠보다 대여 콘텐츠가 많다. 자체적으로 자막이나 음성 낭독 서비스를 제공하기엔 저작권 문제와 비용 등이 걸림돌로 작용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큰 비용을 들여 자막을 넣어도 대여 계약이 끝나거나 콘텐츠 권리자가 직접 유통하는 식으로 상황이 바뀌면 자막도 함께 폐기된다”면서 “이용자 편익을 위해 투자는 하고 있으나 불확실성이 큰 만큼 과감하게 뛰어들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고 토로했다. 시나리오를 자막화하는 과정에는 저작권 문제도 뒤따른다. 해외와 달리 국내는 콘텐츠 계약 범위에 자막을 포함하는 사례가 드물다. 같은 콘텐츠여도 플랫폼마다 자막이 별도로 제공되면서 저작권리자 입장에서는 확인 비용이 이중으로 부과될 여지가 생긴다. 한 관계자는 “장기적으로는 콘텐츠 권리를 가진 제작사가 기획 단계부터 배리어 프리를 감안해 제작하고, 콘텐츠 관리자가 공인한 자막을 각 플랫폼이 공유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전했다.

자막 지원 외에도 더빙 필요성 절실… 인식 개선은 과제

어려움을 딛고, 콘텐츠 업계는 천천히 변화를 이어가고 있다. 왓챠는 지난해부터 국내 콘텐츠에 자막 비중을 확대해 현재 240편 정도에 한글 자막을 서비스 중이다. 티빙은 지난해 오리지널 영화 2편에 자막 서비스를 시작했다. 앞으로 개발 단계를 거쳐 자막 적용 콘텐츠를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웨이브는 ‘SF8 - 러브씬넘버#’, ‘꼰대인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트레이서’ 등 오리지널 콘텐츠 5편에 자막을 배치했다. 웨이브 관계자는 “현재는 청각장애인에 중점을 두고 자막 위주로 제공 중이나 수어, 화면해설 등 서비스 확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애인 복지 채널인 복지TV는 지난 25일부터 대선후보 토론회를 생중계하며 출연진과 사회자 전원에게 1:1로 수어 통역사를 배치했다. 생방송 토론에서 후보자별로 각각 수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국내 최초다.

사회적 인식 개선은 모두의 숙제다. 최근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 시즌2’는 수어 통역사를 희화화하는 콩트를 방송해 논란이 됐다. 한국어 더빙과 자막을 모두 제공하던 EBS ‘위대한 수업’은 시청자 의견을 이유로 더빙을 중단해 시청 약자를 배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영국 등과 대비된 행보다. 미국은 2010년부터 ‘21세기통신영상접근법’을 개정해 인터넷으로 공개되는 방송 프로그램에 자막을 넣고 있다. 영국 역시 법제화를 거쳐 2017년부터 VOD에 자막·수어·화면해설 제공을 의무화했다.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관계자는 “지금까지의 배리어 프리는 자막과 수어 통역 위주로 한정돼 있다”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지원이나 더빙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콘텐츠 제작자가 자발적으로 서비스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함께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사회적 의식 함양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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