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역할, 장애인 배우가 연기할 순 없나요

장애인 역할, 장애인 배우가 연기할 순 없나요

기사승인 2022-02-28 06:00:02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공연 장면. 노네임씨어터

유대인 부부 크리스토퍼와 베스는 청각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 빌리에게 수어를 가르치지 않는다. 빌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청각장애인에 가둘까 걱정해서다. 평생 비장애인 언어를 쓰고 살던 빌리는 청력을 잃어가는 수어통역사 실비아를 만난 뒤 달라진다. 가족이 반대하는 청각장애인 모임에 나가고 수어도 배우면서 소속감을 느낀다. 어느 날, 가족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빌리는 ‘앞으로는 상대방 입술을 읽지 않고 수어로만 말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한다. 27일 막 내린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내용이다.

주인공 빌리를 연기한 배우 강승호와 이재균은 모두 한국어를 제1언어로 쓰는 청인이다.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서 수어를 배워 연습했다고 한다. 반면 영국 극작가 니나 레인이 쓴 원작 초연에선 수어를 제1언어로 쓰는 농인 배우 제이콥 카셀덴이 빌리 역할을 맡았다. 온라인에선 ‘농인 역할은 농인 배우에게’라는 의견이 불거진 건 그래서다. 설상가상으로 영국과 달리, 한국 공연에선 청각장애인 관객을 위한 자막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아 “제작사가 농인을 모독했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비단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만의 문제는 아니다. 티빙 오리지널 영화 ‘미드나이트’(감독 권오승) 측은 청각장애인 역할에 비장애인인 배우 진기주와 길해연을 캐스팅했다. 두 배우는 작품을 위해 수어를 따로 배웠다. 영화 ‘보통사람’(감독 김봉한)에서도 비장애인 배우 라미란이 청각장애인으로 나온다. 외국은 어떨까. 영화 ‘이터널스’(감독 클로이 자오), ‘코다’(감독 션 헤이더), ‘콰이어트 플레이스’(감독 존 크래신스키) 등 여러 작품에서 청각장애인 역을 청각장애인 배우들이 연기했다. ‘코다’에서 아빠 프랭크 역을 연기한 배우 트로이 코처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영화 ‘코다’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트로이 코처(가운데). 판씨네마

 

물론 당사자성을 완벽하게 반영해 배우를 캐스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장애인을 보호나 연민의 대상으로 보거나 장애를 극복해야 할 장벽으로 여겨온 비장애인 중심 문화와 장애인의 사회 진출이 극도로 제한된 사회 구조를 돌이켜 보면, ‘농인 역할은 농인 배우에게’라는 요구가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20년 넘게 장애인 배우를 발굴·육성해온 김은경 한국장애인방송연기자협회 상임이사는 “함께 일한 장애인 배우 대부분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늘 갖고 있다. ‘장애인은 안 돼’라는 인식을 개선하고, 비장애인만큼 충분한 장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다.

한 공연계 관계자는 장애인 배우, 나아가 장애인 예술가가 주류에서 배제되는 이유를 “예산 문제”에서 찾았다. 장애인 예술가를 기용하려면 수어통역사 같은 추가 인력을 배치해야 하는데, 제작사들이 이런 비용을 꺼린다는 설명이다. 국고보조금을 받는 국립극단이 지난해부터 ‘배리어프리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장예예술 희곡 및 작품을 개발하고 장애예술가를 지원하고는 있으나, 민간 극장이나 제작사의 참여는 여전히 요원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장애인 예술가들과 협업하려는 시도는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다음 달 서울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되는 연극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에는 농인 배우와 청인 배우가 각각 1명씩 출연한다. 국립극단이 지난해 ‘장애와 예술’을 주제로 공모전을 벌여 선정한 작품 중 하나다. 9회 공연은 예매를 시작한 당일 매진됐다. 이밖에도 ‘장애와 예술’을 주제로 한 공연 ‘커뮤니티 대소동’과 ‘소극장판-타지’가 3~5월 관객을 만날 계획이다.

김 이사는 “장애가 있는 배우들도 충분히 연기 수업을 받으면 충분히 대본을 이해하고 감독님과 소통할 수 있다. 지체장애 2급인 배우 길별은은 JTBC 드라마 ‘갑동이’ 출연 당시 함께 연기한 배우 성동일에게 연기로 칭찬을 받기도 했다”면서 “앞으로도 장애인들이 자기 재능을 빛낼 수 있도록 트레이닝할 계획이다. 문화예술계 창작자들도 장애인 배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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