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할리우드산 히어로 가운데에서 배트맨이 차지하는 입지는 독특하다. 위기에 빠진 지구평화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뇌하는 캐릭터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선악 구분이 모호하다. 그리고 역대 가장 완성도 높은 히어로 영화로 손꼽히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3부작 주인공이기도 하다. 10년 만에 리부트된 영화 ‘더 배트맨’(감독 맷 리브스)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더 배트맨’은 고담시에서 이제 막 히어로로 알려지기 2년차 배트맨 이야기를 다룬다. 시장 선거를 앞두고 리들러(폴 다노)는 연쇄 살인을 저지르며 배트맨에게 수수께끼를 남긴다.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은 배트맨으로 경찰과 함께 추적하며 과거에 벌어진 고위급 대규모 비리 사건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 사건에 자신의 아버지도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에 빠진다.
미완성인 청년 히어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으로서 스스로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아직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상태다. 약한 확신에 비해 고담시에 내려앉은 끔찍한 어둠과 점점 심각해지는 미스터리가 영화 전체를 무겁게 누른다. 곳곳에서 어설픈 대처와 사고들이 발생한다. 여기저기 부딪히며 힘겹게 목적지로 나아가는 자동차 추격 장면과 매끄럽지 못해 매번 몸에 상처를 남기는 액션 장면은 상징적이다.
경찰과 배트맨이 눈앞에 벌어진 사건을 해결해도 세상이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지나치게 영리한 빌런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해야 하는 처지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한 줄기 힌트를 붙잡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거나 악당을 시원하게 때려잡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밤마다 질척거리는 거리를 헤매는 배트맨의 모습은 20세기 영화들에서 볼 수 있던 음울한 느와르 장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는 영화다. 수많은 조각으로 나뉜 단서는 리들러에 의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된다. 배트맨의 그림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나름대로의 결론을 찾은 배트맨의 마지막 모습은 안쓰러울 뿐이다. 영화 내내 이 히어로를 응원하고 지켜보고 싶은 근거를 찾기 어렵다. 아주 오래된 원작 만화의 정서와 ‘다크 나이트’ 3부작의 후광 위에 지은 조악한 집을 구경하는 느낌에 가깝다.
지난 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