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수박에 새겨진 글자,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인생이여 만세). 극작가 겸 연출가 추정화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가 생애 마지막 남긴 그림 ‘비바 라 비다’를 보고 전율했다. 소아마비로 오른다리를 잃고,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서지고, 유산을 세 번이나 겪은 칼로의 마지막 메시지가 ‘인생 만세’라니. 추 연출가는 그날부터 칼로를 파고들었다. 칼로가 지킨 삶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시어터에서 상연 중인 뮤지컬 ‘프리다’ 탄생기다.
홀로 쓴 ‘프리다’가 무대에 오르기까지
최근 서울 도곡동 EMK뮤지컬컴퍼니(이하 EMK)에서 만난 추 연출가는 한 마디로 ‘프리다 칼로 박사’였다. 칼로의 그림과 일기, 그의 삶을 다룬 책들, 심지어 칼로가 심취했던 멕시코 혁명에 관한 논문까지 두루 섭렵한 덕분이었다. 그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3년 전 ‘프리다’ 초고를 썼다. “돈 한 푼 없는” 그를 위해 김소향 등 절친한 배우들이 자투리 시간을 내 대본 리딩을 도왔다.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요. 배우들 모두 각자 공연을 마치고 밤 10시가 넘어 모였어요. 개런티(출연료)를 줄 수 없었거든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추 연출가는 ‘죽음이 사랑한 프리다’를 테마로 극본을 썼지만, EMK 쪽으로부터 뮤지컬 ‘엘리자벳’과 설정이 비슷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극본을 싹 갈아엎었어요. 노래도 모두 다시 썼고요.”
불 같은 집념 덕분일까. ‘프리다’는 2020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에서 첫 선을 보였을 당시 초연작 중 가장 빼어난 작품에 수여되는 창작뮤지컬상을 받았다. 이듬해 초청공연에선 예매 시작 1분 만에 모든 좌석이 팔려나갔다. 지난 1일 개막한 정식 공연도 관객 평점 9.7점을 기록하며 인기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추 연출가는 “‘엄마와 함께 또 보러오겠다’는 반응이 많다”며 “‘프리다’는 고난 속에서도 붙들어야 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작품이다. 인생을 아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 그런 반응이 반갑다”고 말했다.
설명 대신 여백…‘프리다’ 연출의 비밀
칼로는 1907년 태어났지만 자신을 1910년생으로 여기며 살았다고 한다. 당시 벌어진 멕시코 혁명과 함께 자신도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해서다. 어려서부터 농민군을 보고 자란 칼로에겐 혁명의 피가 흘렀다. 추 연출가는 이런 배경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대신, “사파타(농민군 지도자)의 병사들과 자란 내가 뭐가 무섭겠느냐”는 한 줄 대사로 함축했다. “설명은 배우들에게 해주는 걸로도 충분해요. 자기가 이해한 만큼 연기로 표현해주거든요.”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도 추 연출가는 서술 대신 여백을 택했다. 쉽지는 않았다. 둘의 관계가 워낙 복잡해서다. 리베로는 외도를 일삼았다. 칼로는 괴로워하면서도 리베로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못했다. “칼로는 자신의 모든 것에 리베로가 있다고 했어요. 자화상에서 자기 이마에 리베로 얼굴을 그릴 정도로 자신과 리베로를 동일시했어요.” 추 연출가는 ‘어떻게 해야 작품 안에서 리베로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처음엔 “칼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리베로의 대사를 A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구구절절” 썼지만 결국 모두 지웠다. 대신 “넌 다리 따윈 없어도 돼. 날개가 돋을 테니”라는 대사로 상황을 갈음했다. 좌절한 칼로에게 리베로가 건네는 위로다. 추 연출가는 “이 대사면 리베로가 용서받기 충분하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여백을 남기는 연출은 배우들 덕분에 가능했다. “각 장면을 왜 넣었는지 배우들에게 설명하면, 배우들은 그 내용을 죄다 씹어 삼킨 뒤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찾아서 연습실로 돌아왔어요. 함께 수다 떨고 토론하며 훨씬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내곤 했어요.” 프리다 역을 맡은 배우 최정원과 김소향을 평해달라고 청하자, 각각 “따를 수밖에 없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100m 달리기하듯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추 연출가는 “두 배우 모두 프리다 칼로 그 자체”라며 “배우들이 내뿜는 에너지가 작품에 엑셀을 달아줬다”고 했다.
“여성은 아름답고 강인한 존재”
‘프리다’는 우먼파워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캐스팅된 배우 9명 모두 여성이고, 허수현 음악감독을 제외하면 주요 제작진도 대부분 여성이다.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코르셋은 작품에서 갑옷으로 탈바꿈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죽음 문턱까지 갔던 칼로는 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삶을 주도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코르셋을 입는다. “더 굳세게, 더 강하게. 내게 갑옷을 줘. (중략) 피하지 않아. 다만 견딜 뿐. 그게 나야.” 추 연출가는 칼로의 부활을 알리는 노래 ‘코르셋’에 이런 가사를 썼다. 칼로의 굳센 의지를 보여주는 노랫말이다. 그는 “실제로 칼로는 의료용 코르셋을 착용했다고 한다”면서 “칼로가 코르셋을 입는 장면에서 그가 전사로 다시 태어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코르셋이 기존의 섹슈얼한 이미지가 아닌, 전사 같은 강인한 모습으로 표현되도록 의상 디자이너와 함께 심혈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추 연출가는 “‘프리다’ 속 칼로는 내가 바라는 여성상”이라고 말했다. “여성은 아름답고 강인해요. 비겁하지 않고 정정당당하며 고난을 받아들일 줄 알죠. 자신의 품위와 우아함을 지키려 하고, 돌을 맞을지언정 솔직해요. 그게 ‘프리다스타일’이기도 하고요. 고난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여자의 이야기를 앞으로도 계속 쓰고 싶습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